"이거 좀 부탁해." 친구는 요새 '투사'가 됐다. 때마다 보내오는 건 국민청원 링크. 정부의 난임 지원을 확대해달라는 간절한 요구가 담겼다.
시험관 시술에 드는 비용은 매회 수백만 원. 문제는 소득기준 탓에 맞벌이는 한 푼도 지원받기 어려운 데다, 지원을 받더라도 횟수 제한에 걸리다 보니 경제적 부담에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하소연이다.
많은 걸 희생하고서라도 낳겠다는데. 저출산 대책에 쏟아부었다는 수백조 원은 다 어디에 썼길래. "숫자가 적잖아.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냥 성가신 거겠지." 꽉 깨문 입술에선 설움이 새어났다.
돈은 어쩌면 부차적이다.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주변의 편견과 눈총, 불이익을 감내하는 것도 '그들'의 몫.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명제에 끼어들지 못하는 난임의 차별은 그렇게 숨어 있었다.
겪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 이토록 차별은 복합적이다. 차별 안에서도 위계가 갈리고 순서가 매겨진다. 촘촘하고 방대하게 펴놓은 그물망에서, '우리'와 '정상', '다수'와 '강자'의 세상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 누구든, 언제든 손쉽게 탈락하고 배제당할 수 있는 게 차별의 본질이다.
그 멋대로의 야만을 제어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며 지난 14년간 외쳐 온 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성별, 장애, 병력, 나이, 피부색,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존재를 구분 짓고 차별하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권리. 넘쳐나는 모욕과 혐오를 멈추고 모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천명해야 할 선언. 유엔이 권고하고, 국민의 80%가 지지하지만 유일하게 국회만 미적대며 '차별'하고 있는 그 법 말이다.
정치권은 성소수자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일부 보수 개신교를 탓하지만, 과다 대표된 증오와 적개심 뒤에 숨은 핑계일 뿐이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도 모자라 '차별 말라'는 외침에 "다했죠?"(이재명 후보)라며 넘겨 버리는 고약한 태도, '차별하고 혐오할 자유'를 말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평등의 자유 침해"(윤석열 후보)를 들고 나온 얄팍한 인식은 노골적 반대보다 더 나쁘고 비겁하다.
빙빙 둘러대지만, 권력자들이 차별금지법에 적극적이지 않은 진짜 이유는, 차별받는 위치에 있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핍박당하며 죽어 가는데 "그들이 약자"냐고 쏘아붙이는 한 국회의원의 처참한 인권감수성, 코로나19 악화로 병상을 못 구한 국민들은 길에서 죽어 가는데 경제부총리 아들은 전화 한 통으로 VIP실에 입원하는 특권의 세상에서 차별이 가당키나 한 단어겠는가.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이 희한한 부정의를 굳건하게 지탱하는 차별주의자들에게 그깟 몇 줄의 법은 절실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온전히 강자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당신도 언제든 차별받는 고통에 신음할 수 있다.
여전히 일부 반대론자들의 문자폭탄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수많은 국민에게 여의도를 향해 똑같이 대국민 문자폭탄을 보내자고 제안해본다. 어디 한 번 제대로 당해보시라. 지금 필요한 건,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사회적 상식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