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혜화역 리프트에서 추락했던 장애인, 그의 싸움은 계속된다

입력
2021.12.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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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
기자가 따라간 이규식씨의 하루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늘었어도
무섭고, 어렵고, 때론 불가능한 이동
장애인들 투쟁으로 바뀌어온 제도들
노인·임신부 등 다른 교통약자도 혜택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앞엔 동판이 하나 있다. 문구는 이렇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1999.6.28 혜화역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

1999년 그날 사고를 당한 이는, 뇌병변 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이규식씨였다. 장애인 야학에 다녀오다 휠체어 이동용 리프트에서 떨어져 다쳤다. 이씨가 학생으로 있던 장애인 야학은 서울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500만 원 배상이라는 조정안을 받아냈다. 법원으로부터 '이동권'을 인정받은 첫 사례였다. 이후 혜화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이씨가 사고를 당하고 2년 후 2001년 경기 시흥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에서 추락해, 아내가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이씨와 동료들이 본격적으로 "장애인도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계기였다.

20년이 흘러 서울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 설치율은 92.2%(올해 4월 기준, 283곳 중 261곳). 이만하면 된 걸까. 장애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 52세가 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서울지부 대표로 활동하는 이씨가 요즘 매일 오전 8시 혜화역 그 장소로 가는 이유이다. 지난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선전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씨와 하루를 동행하며, 휠체어 바퀴 앞에 놓인 부당함을 들여다봤다.



①장애인 콜택시, 거리서 40분 기다려

왼손만 쓸 수 있는 이씨는 활동지원사와 동행했다. 활동지원사는 평일 내내 이씨의 집에서 상주하며 그를 돕고, 이동할 때도 함께한다. 그런데도 이동이 쉽지가 않다.

오전 8시부터 1시간가량 진행된 혜화역 선전전을 마친 이씨는 이날 남대문경찰서와 마포경찰서, 영등포경찰서를 차례로 들러야 했다. 전장연 서울지부 '대표'인 자신이 집회 신고서를 넣어야 해서다. 전장연은 내년 1월 3일 광화문 등지에서 이동권 관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지하철로 남대문경찰서로 이동해 집회신고를 마치고, 마포경찰서로 가려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다.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예상 대기시간을 12분 정도라고 예고했으나 10분이 지나자 콜택시 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부터 20~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커피나 한잔합시다." 기다림이 익숙한 듯 이씨는 커피를 제안했다. 남대문경찰서를 나와 근처의 카페를 찾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평소에는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한 뼘가량 높이의 문턱 때문이었다. 전동휠체어로는 이를 넘기 어려웠다.결국 커피를 사서 나와 거리에서 마셨다. 커피는 따뜻했지만 추위를 녹이긴 역부족이었다. 거리에서 40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장애인 콜택시가 도착했다


서울시는 올해 2월 장애인 콜택시를 대폭 늘려 총 740대를 운영하고, 평균 대기시간을 2년 만에 55분(2019년 기준)에서 20분 대로 줄였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러나 이날 택시 호출 후 마포경찰서에 도착하기까지 55분이 걸렸다. 일반 택시로는 10분 안팎이 소요되는 거리다. 이씨는 "비록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서울은 바로 부를 수라도 있다. 지방에서는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택시를 탈 수 있는 곳도 있다"라고 귀띔했다.

②혼자 작동시킬 수 없는 리프트

경찰서는 공공기관인만큼 교통약자를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지하에 있는 마포경찰서 민원실로 가는 훨체어용 리프트는 처음 본 기종이라 조작법을 알 수 없었다. 호출벨을 누르자 나온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이씨 일행을 바라보더니 "(사용법을) 잘 모르겠다"면서 다른 직원을 데리고 나왔다.

다른 직원이 나와 조작법을 설명해줬으나,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이씨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리프트였다. 활동지원사가 함께 올라타 출발시켜야 했다. 리프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직원은 '민원인이 기다리고 있다'며 들어가버렸는데, 막상 목적지에 도착한 리프트가 바로 열리지 않았다. 이씨와 활동지원사 모두 리프트에 발이 묶였다. 기자가 들어가 작동법을 다시 물어야 했다.

③바닥에 닿지 않는 저상버스 발판

영등포경찰서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시 기준 휠체어가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 도입률은 56.4%로 두 대 중 한 대꼴이다. 가는 길을 미리 지도 앱으로 찾아본 활동지원사는 한 차례 다른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한다면서 "운이 나쁘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바로 타고, 그렇지 않으면 마냥 기다려야 하는 '복불복'이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저상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나온 발판이 바닥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이씨의 활동지원사가 발판을 꾹 누르고 나서야 휠체어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환승 구간에서도 바로 저상버스가 왔다. 활동지원사는 "오늘은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라며 "평소엔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도 못 본 체 지나가기도 하고 '자리 없다'고 태워주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굉장히 운이 좋은 날'이라는데, 이씨가 마포경찰서에서 영등포경찰서로 가는 데 소요된 시간은 45분. 기자 혼자 버스를 이용했더라면 걸렸을 시간(30분)보다 15분이 더 걸렸다. 하차도 쉽지 않았다. 인도에 있는 나무와 표지판, 소화전 등을 피해야만 발판을 내릴 수 있는 탓에 버스는 정차 지점을 몇 차례 재조정해야 했다. 교통약자를 위한 하차 장소를 표시해뒀다면 한 번에 내릴 수 있었겠지만 도로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④너무나 '무서운' 지하철 리프트

이씨가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 찾는 한의원이 이날 외출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이씨는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아직 엘리베이터가 없는 충무로역을 들렀다. 리프트의 위험함을 기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서울 지하철에는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환승용 포함)이 22곳이다. 2015년 서울시는 2022년까지 '서울 지하철 1역사 1동선 엘리베이터'를 약속했으나 예산 등을 이유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1동선'이란 지상에서 역사 대합실을 거쳐 승강장까지 엘리베이터로 움직일 수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충무로역은 4호선 승강장보다 낮은 곳에 설치된 3호선으로 가려면 장애인용 리프트를 이용해야 한다. 계단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아찔했다. 이씨가 장애인용 리프트 호출버튼을 눌렀다. 이 호출버튼은 2018년 이전에는 계단과 불과 50㎝ 떨어진 곳에 설치돼 장애인이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지체장애인 고(故) 한경덕씨가 신길역에서 버튼을 누르려다 계단 아래로 추락, 사망한 이후에야 버튼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렇게 한발 한발의 개선에는 늘 장애인들의 희생이 전제됐다.


호출버튼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왔지만 계단 아래 있는 리프트가 올라오는 데만 4분이 넘게 걸렸다. 리프트의 안전 장치는 고작 안전 바 하나뿐.

리프트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는 이씨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리프트를 한 번 타보면 (이런 두려움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리프트를 가리키며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거다. 이전에 장애인들이 (리프트로 인해) 다치고 죽었다"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설치를 말하는 이유이다. 장애인 단체에서는 리프트를 '살인기계'라고 부른다. 1999년 이후 올해까지 수도권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 관련 사고는 17건으로 장애인 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2001년 1월), 5호선 발산역(2002년 5월), 인천1호선 신연수역(2006년 9월), 1호선 화서역(2008년 4월), 1·5호선 신길역(2017년 10월)에서 리프트에 탔던, 혹은 타려던 장애인이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사망했다.


리프트가 아니라도 지하철역에서 위험천만한 순간이 계속됐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는 이씨의 휠체어 뒷바퀴가 승강장과 전철 사이로 빠져버렸다. 그의 몸이 덜컹 내려 앉자 활동지원사가 재빨리 휠체어를 들어냈다. '열차와 승강장 간격 넓음'이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었으나 사고를 막을 순 없었다.

⑤탈 수 없는 마을버스, 40분간 휠체어를 몰다

한의원에서 이씨의 집으로 돌아가려면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그러면 약 20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씨는 탈 수 없었다. 올해 1월 서울시 최초로 마을버스에도 저상버스가 도입됐지만 서대문구와 동작구에서만 각각 6대와 2대가 운영된다. 결국 도보로 40분가량이 걸리는 거리를 그와 함께 이동해야 했다.

또 인도가 좁아 전동휠체어가 차도로 다녀야 한다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이씨 역시 "불가피하다지만 이렇게 차도로 다녀야 할 때마다 무섭다"면서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아찔하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이씨는 앞서 서울 공덕역 근처 도로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채 오토바이와 부딪히기도 했다.


앞서 혜화역 시위 현장에서 승·하차 시위로 전철이 지연되자 시민들로부터 험한 이야기도 들었다. 이씨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은 다들 제 살길 바빠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치거나 나이가 들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도 시위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사회변화를 위해 싸움은 멈출 수 없을 뿐이다. 전장연은 국회에 계류 중인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천준호·심상정 의원 안)의 연내 통과를 위해 시위를 이어갈 예정이다.



우리 모두, 이들의 투쟁에 빚졌다

교통약자법에서 말하는 약자는 장애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장애인, 고령자, 임신부, 어린이,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의 교통약자는 국민의 29.7%(1,540만 명)로 집계됐다. 10명 가운데 3명이 교통약자인 셈이다.


이날도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들 중 장애인은 이씨 한 명뿐이었다.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요구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오히려 언젠가 필연적으로 고령자가 될 사회 구성원들은 이들의 투쟁에 빚지고 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은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냈다. 저상버스 도입,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등 변화도 이어졌다. 지하철역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이들도 나중에는 장애인들이 이끌어낸 제도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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