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12월21일 대한민국 경제성장에 기여… 파독 광부 1진 123명 출발

입력
2021.12.21 05:30
1963년 12월 21일
해외 인력 수출을 통해 실업난 해결 및 외화 획득
초심자들은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63년 12월 21일 오전 10시, 한 무리의 건장한 청년들이 에어프랑스 전세기에 오르며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들은 서독으로 떠나는 파견 광부 제1진 123명이었다. 애초 출발 예정자는 126명이었으나 3명은 포기했다. 광부 일행은 당시 경제기획원 이창제 사무관 인솔로 도쿄에 잠깐 기착한 다음 북극을 거쳐 22일 오후 6시 서독 ‘두센도르프’에 도착했다. 곧이어 그들은 서독 함보르터 탄광과 에치바일러 탄광으로 향했다.

제2진 126명은 같은 달 26일 루프트한자 전세기를 타고 떠났다. 이후 1977년까지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로 파견됐다. 1966~1976년 사이엔 간호사, 간호조무사 12,000여 명도 서독의 병원과 요양소에 배치됐다.


서독 상업차관 제공과 한국의 인력 수출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60년대 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 안팎에 머물렀다. 북한보다도 못 사는 나라였고 실업난도 심각했다. 파독 광부들의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기준 13만∼19만 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의 8배였다. 높은 수입에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행을 희망했다. 그러나 광산 노동의 경험이 없던 초심자들은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광부들의 독일 파견은 박정희 정부가 서독에 차관을 요청하며 시작했다. 1961년 12월 한국 정부는 서독과 ‘한ㆍ독 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해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 약 1억5,000만 마르크(약 3,750만 달러)를 받기로 합의한다. 이 중 7천500만 마르크는 한국의 개발사업을 지원하는 독일 국영 금융기관의 연리 최고 6%의 투자금이었다. 나머지 7천500만 마르크는 한국이 독일 기계류를 수입할 때 독일 정부가 공급업체에 그 금액만큼의 판매대금 수령을 보증하는 연리 3%의 신용제공이었다.

이후 1963년 12월 16일 한국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광부 파견 협정이 이루어진다. 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는 해외 인력 수출을 통해 실업난 해결 및 외화 획득을, 독일은 광부 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했다.

파독 광부들이 지하 2,000m 갱도에서 목숨을 걸고 모은 돈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2008년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 보고서는 1964년부터 1975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등 파독 인력의 송금 총액을 1억7,000만 달러로 계산했다. 당시 총수출액 대비 이들의 송금액 비중은 1966년 1.9%, 1967년 1.8%였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은 각기 0.12%, 0.13%였다. 낯선 이국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설움을 이겨내며 이들이 송금한 외화가 경제 성장의 종잣돈으로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2021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5,000달러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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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