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2000일, '내가 되기까지'의 성장 스토리

입력
2021.12.18 10:00
17면
<66> 애플TV플러스 '비커밍 유'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나의 둘째 조카는 2016년 1월생으로, 2,000일 하고도 몇 개월을 더 살았다. 지난겨울이 오기 전까지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은 일은 나의 큰 걱정 중 하나였는데, 만 5세가 되어가는 둘째 조카가 하늘에서 내리는 진짜 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1년 전에 눈사람을 인구 수만큼 만들어도 될 정도의 눈이 내렸고, 눈밭을 뛰어다니는 조카들의 사진을 받아본 뒤 걱정이 하나 줄어들었다. 다음 걱정과 질문은 사랑하는 어린이가 있는 대부분의 어른이 그러하듯이, 이 팬데믹 시절과 관련된 것이다. 살아온 시간의 절반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타인과 닿는 일을 조심하며 날마다 지내야 하는 어린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잔인한 바이러스가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기 이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고 있을까? 감정, 몸짓, 언어를 배우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애플TV플러스의 '비커밍 유'는 한 사람이 '생후 2,000일 동안 무력한 신생아에서 지구상 가장 유능한 생명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시리즈이다. 전 세계 100명의 아기와 어린이가 자라나는 과정의 일부로부터 인류 공통의 성장을 읽어낼 수 있다. 런던, 뉴욕, 도쿄와 같은 대도시부터 네팔이나 몽골과 같은 저개발 지역, 난민 캠프까지 이들은 세계 곳곳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지만, 비슷한 '처음'을 경험한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서 5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기초적인 능력을 거의 전부 갖추게 된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내가 있는 세상을 인지하고, 움직이고 말하며, 자신의 힘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다.


'비커밍 유'는 갓 태어난 아기들이 자신의 이름을 인지하게 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양육자를 포함한 수많은 타인에게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인 나 자신을 인지하고,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아직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는 화면 속의 일본 아기가 거울의 자신을 '베이비'라고 말하는 장면은, 내 작은 의문이 하나 풀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갓 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두 살 때의 큰조카가 가족사진 속의 가족은 모두 누구인지 맞히면서도 사진 속 자신은 '아기'라고 불렀던 일이 늘 의문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첫 돌 전후의 아기들에게 '나'라는 개념이 없으며, 걷기 시작한 이후에도 거울이나 사진 속의 '나'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랬던 아기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집중하는 것이 생기고, 타인과의 공통점뿐만 아니라 차이점도 발견하면서, 이제 막 걷고 뛸 수 있게 된 작은 인간들은 '나'를 알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한 타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간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서, 아이들은 내가 사는 사회를, 관계를 이어 배운다. 나를 알게 된 이후의 과정에는 언제나 타인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1화 이후, 아이들은 움직이는 법을, 친구 사귀는 법을, 느끼는 법을, 말하는 법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이 에피소드마다 충실히 담긴다. 보르네오 바자우 마을 수상 가옥에 사는 라다는 이웃집 친구에게 가기 위해서 물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법을 알게 된 탓에 동생이 태어나기 전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던 런던의 포피는, 갓 태어난 동생을 안아보고 불안이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다.


모든 성장에는 감동이 있기 마련이므로, 뭉클한 순간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이 일화를 언급하고 싶은 이유는, '비커밍 유'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런던의 베티는 동물원에 갔다가 원숭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안내판을 읽으려는 친구를 가로막고, 욕심을 내서 먼저 읽어버린다. 순간 찾아온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의 이유를 알지 못했던 베티는, 집으로 돌아와 동물원 놀이를 하면서 이전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다시 고민한다. 이 장면의 내레이션이다. "베티는 더 나은 친구가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인간은 더 나은 관계를 맺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노력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는 이야기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 자신이 되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인간은, 자신의 고유함과 마찬가지로 모든 개인이 고유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동시에 아는 것이 '인간 됨'은 아닐까. '비커밍 유'라는 제목을 직역하면 '네가 되기까지'일 것이다. 영어의 뉘앙스를 고려하면 원제목의 '너'가 타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목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되기까지'라는 번역이 더욱 자연스럽다.


아이들이 왜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지, 아이들이 왜 물건을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뜨리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다큐멘터리가 영유아 양육자만을 위한 작품인 것은 아니다. '비커밍 유'를 보는 모든 인간은,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다시 깨달을 수 있다.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같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모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우리는 이미 인간으로서 생애 첫 5년 동안 모든 처음을 통과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을 하든 그렇지 않든, 그 어떤 사건도, 감정도, 관계도, 변화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의 눈부신 성장을 확인한 어른이라면, 자신의 미숙함에 대하여 다음 세대에게 '처음이라 그렇다'는 핑계를 대는 일은 부끄러운 태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라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변명거리를 찾아내기에 앞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진짜로 모든 것이 처음인 작은 인간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버린 책임, 어린이들에게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없는 세계에 살게 한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 그걸 알려주는 작품이다.


올해 가장 가슴 아픈 한마디는 둘째 조카에게서 들었다. 놀이터를 갈 준비를 하며 마스크를 쓰곤, 조카가 말했다. "네 살 때가 좋았어요." 조카가 한국 나이로 네 살이었던 해는 2019년. 지금 돌이켜 보면 가장 멀게 느껴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찾아오기 전 마지막 해다.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은 마음보다 조카들이 이런 세상에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질 때면, 이름을 가진 다음 세대의 존재를 사랑하는 일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라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했다. 그 불안하고 걱정됐던 마음이 '비커밍 유'를 보고 난 뒤 조금 잔잔해졌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계지만, 나의 조카를 포함한 모든 어린이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현재를 배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전이나 이후가 아니라 오직 지금을 살면서, 어린이들은 모두 부지런히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모든 것이 나빠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조카들이 자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한 계절만 지나도 훌쩍 키와 몸이 커지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 성장해가는 인간을 깊이 사랑하는 일로, 내가 되어가고 있다. 1만4,000일을 넘게 살았는데도, 새롭게 내가 된다. 분명히 배웠을 텐데, 이건 미처 몰랐다.

윤이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