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업계에서는 지금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영화가 화제다. 여기서 업계란 잡지처럼 실물로 인쇄되는 종이매체 시장을 말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웨스 앤더슨 감독이 자신이 사랑했던 종이매체에 바치는 107분짜리 헌사다. 그는 폐간을 앞둔 가상의 주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를 통해 오늘날 빠르게 사라져가는 잡지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감독의 단골 페르소나인 빌 머레이를 비롯해 틸다 스윈턴, 프랜시스 맥도먼드, 오웬 윌슨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최정예 저널리스트 4인을 연기하는데, 여기서 새저랙(오웬 윌슨)이 진행하는 ‘지역색(Local Color)’ 지면은 과거 '뉴요커'의 인기 꼭지였던 ‘Talk of the Town’을 연상시킨다.
직역하면 ‘마을 이야기’, 의역하면 ‘장안의 화제’쯤 되는 이 꼭지는 한때 뉴욕 곳곳의 화젯거리와 문화계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새저랙은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의 오래된 (가상) 도시 앙뉘의 구석구석을 실시간으로 기록한다. 좁은 골목 사이로 주민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젊은이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산업화를 겪고 있는 도시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나름의 해석을 더해 기사로 풀어낸다. 사전 섭외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스파이처럼 훔쳐보는 취재라니,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5G 속도로 소식을 전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낡은 수법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장면에서 눈가가 약간 촉촉해졌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지금 내 편집장이 내게 그런 방식으로 동네를 취재하라고 하면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 동네를 아주 공들여 관찰한 작가가 있다. ‘얼굴 없는 작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는 이 비밀스러운 작가(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 필명이다)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네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간된 ‘나폴리 4부작’이 그것이다.
조용한 모범생 타입의 ‘레누’와 ‘맹금류 같은 눈빛’을 지닌 ‘릴라’. 두 여자의 60년에 걸친 우정을 그린 ‘나폴리 4부작’은 ‘Talk of the Town’의 장편소설 버전이다. 무려 2,000쪽이 넘는 소설 대부분이 나폴리와 그곳 주민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터프한 명언을 남겼는데, 이 책을 완독하면 굳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릴라와 레누 두 개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나폴리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낯선 도시의 일상을 촘촘히 기록한 새저랙은 기사가 좀 자극적인 것 같다는 편집장의 말에 “세상 모든 아름다움은 저마다의 해로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응수한다. 페란테의 나폴리도 그렇다. 도시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우리가 아는 관광지 나폴리의 아름다움은 아니다. 예를 들어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나폴리에 새 역사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찻길로 새로운 도심지가 형성되고, 압착 롤러가 달린 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아스팔트 위를 지나다닌다. 무언가를 부쉈다 다시 만드는 일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희생되기 시작한다.
화자인 레누의 서술에 따르면, 이 시절 나폴리 사람들은 쉽게 죽는다. 못에 찔려 파상풍으로 죽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는다. 우연히 발견한 폭탄에 손을 댔다가 죽고, 땀을 많이 흘린 다음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는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우편번호가 건강 상태를 결정한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보건장관의 말을 떠올렸다. 어떤 동네에서는 자연히 흘러가는 일이 어떤 동네에는 치명타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네의 속살을 보여주는 건 결국 풍경보다 사람이다. 독자들은 햄 공장에서 손이 짓무르도록 일하는 릴라의 모습을 통해 1960년대 나폴리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레누가 자신이 사실 가부장제에 기대어 성공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는 부분, 동성애자인 ‘알폰소’가 릴라의 영향으로 커밍아웃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통과하는 나폴리의 사회 변혁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어떤 때는 한 인물이 한 동네의 퇴락을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고리대금업자 ‘돈 아킬레’는 당시 나폴리의 서민 경제를 장악했던 파시스트의 앞잡이를, 값비싼 차를 타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마르첼로’와 ‘미켈로’ 형제는 동네 곳곳에 암약하는 마피아 ‘카모라’의 존재를 암시한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외지인 자격으로 동네를 취재한 새저랙과 달리 현지인인 페란테는 구태여 자전거로 골목을 누빌 필요가 없다. 나폴리가 그의 일부이고 그가 나폴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한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이 태어난 동네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형성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관점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사려 깊은 소설가들은 독자가 길을 잃을 것을 염려해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이야기 사이에 중요한 단서를 살살 흘리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중요한 빵 부스러기는 전반부에 나온다. 초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둔 어느 날, 릴라와 레누가 학교 수업을 빼먹고 동네 밖으로 나가는 장면. 그때까지 동네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던 두 소녀는 베수비오 화산 방향에 있다는 바다를 향해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처음에는 둘 다 자유의 기쁨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지만 곧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날이 어두워지고 주변 풍경이 폐허에 가까워질 무렵 “돌아가자”며 상대를 급히 잡아끄는 건 의외로 레누가 아닌 릴라다. 남자애가 던진 돌에 맞아 머리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릴라 말이다.
안절부절못하는 친구의 모습에 레누는 마지못해 집이 있는 동네로 발길을 돌린다. 이 장면은 ‘떠남과 머무름’이라는 ‘나폴리 4부작’의 큰 줄기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동네를 떠나는 사람은 레누, 동네에 남는 사람은 릴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릴라의 ‘머무름’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페란테는 한 인터뷰에서 릴라를 ‘건널목 하나만 건너도 놀라운 모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눈 밝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삶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남산의 멋진 공간 ‘피크닉’에서 새 전시를 시작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영화 '캐롤'의 감독 토드 헤인즈가 시각적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사진가, 사울 레이터의 국내 최초 회고전이다. 엘레나 페란테와 마찬가지로 은둔 작가였던 사울 레이터는 흑백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자신이 살던 동네 근처에서 컬러 사진을 찍었다. 평생을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55년 동안 자신이 사는 로어 이스트 사이드 주변의 거리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살아생전 그가 남긴 말 "신비로운 일들은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늘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는 요즘 내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단골로 돌아다니는 문장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이런 접근에 끌리는 것 같다. ‘떠나간 자’인 레누보다 ‘머무는 자’인 릴라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처럼. 그것은 내가 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타입의 인간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가끔 누군가가 내가 사는 동네를 사려 깊이 관찰하고 기록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난 개포동을 소재로 누군가가 2,000쪽짜리 장편소설을 쓴다면, 혹은 내가 사는 북촌의 주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가가 있다면, 하고 상상하면서. 어떤 풍경은 그저 기록되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운 좋게 우리 곁을 찾아오기도 한다. 영화로, 소설로, 혹은 사진으로. 내가 모르는 동네, 영영 몰랐을 나폴리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