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사과하지 않은 채 지난달 사망했다.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사과 한 마디에 전씨는 끝내 인색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사과할 일이 생기면 직접 나서지 않고 비서실장이나 대변인을 시켜 대독, 대리 사과를 주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부동산 실책에 대해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했지만 입이 무거운 편이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거물 정치인의 사과를 요즘 자주 듣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출마 후 사과 횟수가 두 자릿수에 이른다. ‘형수 막말’ 사건에 당내 경선부터 거듭 고개를 숙였고 음주운전 전력에 대해서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 드린다”고 했다. 2006년 교제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조카를 변호한 일도 사과했고, 대장동 의혹에도 “해명보다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먼저여야 했다”고 자세를 낮췄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사과로 호된 정치 입문 신고식을 치렀다. 그는 10월 ‘전두환 옹호’ 발언을 했다가 비판이 나오자 처음엔 떨떠름하게 유감만 표했다. 그러다 여론이 더 나빠지자 “송구하다”며 사과 수위를 높였지만 당일 밤 인스타그램 계정에 반려견에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개사과’ 논란을 자초했다. 그가 5·18 민주묘지를 찾아 비를 맞으며 재차 공개 사과에 나서야 했던 이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과는 비교적 신속, 정확했다. 진정성도 담겼다. 사과의 기술 면에서는 무오류의 강박에 자신을 가뒀던 선배 정치인들보다 진일보한 듯하다. 눈 앞의 선거를 의식하는 면도 있겠지만 민심 앞에 더 겸허하겠다는 각오로 읽고 싶다.
그런데 사과 빈도가 늘어나면서 이에 반비례해 사과의 무게감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다. 이 후보는 음주운전 사과 이후 윤 후보의 짧은 정치 경력을 ‘초보운전’에 빗대며 “음주운전 경력자보다 초보운전이 더 위험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벼운 처신으로 비쳤다. 윤 후보는 지난달 전두환씨가 사망하자 빈소에 조문 가겠다고 덜컥 나섰다가 대선 캠프 만류로 뜻을 접었다. 하지만 한 달 전 “전두환 정권에서 고통을 당하신 분들께 송구하다”고 했던 그의 사과는 빛이 바랬다.
매끈한 사과의 기술이 전부는 아니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보고 느꼈다. 그는 검찰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2019년 말부터 반복 주장했다. 지지층의 검찰개혁 요구가 들끓었다. 하지만 의혹은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고, 유 전 이사장은 올 1월 장문의 공개 사과문을 재단 홈페이지에 올렸다.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 편향에 빠졌다”와 같은 뼈저린 반성이 담겼다. 일그러졌던 자화상을 가감없이 그리는 모습에 기자도 감동했다. 그는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사과문을 맺었다. 이 역시 바람직한 사과의 기술이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기본을 어긴 행위였다. (…)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다.” 그랬던 그가 선거철이 되자 정치 비평의 장에 다시 나타났다. 마치 무슨 일 있었냐는 듯. TV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하겠단다. 기자의 순진함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