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업존에서 경기를 시작해 교체 선수로 출전하고 있지만, 경기 내 존재감은 그 누구보다 강렬하다. 올 시즌 ‘특급 조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정지윤(21·현대건설) 얘기다.
14일 현재 정지윤은 46.3%에 달하는 공격 성공률로 경기당 평균 10점 안팎을 꾸준히 책임지며 팀의 1위 독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개막 이후 경기 중후반 팀의 주전 레프트(고예림 황민경)가 흔들리거나 확실한 공격이 필요할 때 교체 레프트로 출전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도끼질 스파이크’를 선보이고 있다. 퀵오픈 성공률이 리그 3위(50.0%)인 점이 이를 대변한다.
2018년 데뷔(전체 4순위) 이후 지난 시즌까지 센터와 윙스파이커를 오갔지만 올해 강성형 감독 부임 후로는 줄곧 레프트로 고정 출전 중이다. 네 시즌 만에 처음으로 포지션이 고정됐다. 정지윤은 15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프로 4년 차다. 그래서 레프트도 처음부터 잘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앞섰다”면서 “그런데 초반에 경기가 안풀리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자신감도 떨어졌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이전까지의 경험과 경력은 다 잊고 ‘레프트 신입생’이란 생각으로 바꿨다고 한다. “레프트는 처음이니까, 기본부터 조금씩 배워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경기 출전 시간만 따지면 오히려 지난해보다 줄었다. 여전히 불안한 리시브(효율 22.7%)가 발목을 잡고 있다. 확실하게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려면 리시브효율을 3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정지윤은 그러나 “레프트는 처음인데, 신인이 이 정도 출전하면 기회를 많이 받는 편”이라며 웃었다. 그는 “언니들이 너무 잘해주고 있다. 주전 욕심은 없다”면서 “아직 미흡한 점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내가 들어가면 팀이 흔들릴 수 있다. 처음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올라가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올 시즌 ‘특급 조커’로서의 활약은 지난 8월 KOVO컵부터 이미 예견됐다. 당시 팀이 치른 4경기(14세트) 모두 교체 선수로 출전하고도 득점 1위(68점)에 공격 성공률 1위(38.7%)를 찍으며 대회 MVP에 오르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팀의 3번째 경기였던 조순위 결정전 인삼공사와 경기에서 정지윤은 서브 폭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고, 결국 웜업존으로 물러나 눈물을 펑펑 흘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정지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브를 받을 때마다 실점으로 이어졌다. 동료들과 팀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한마디로 ‘멘붕’에 빠졌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길이구나’라고 깨닫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던 계기가 됐다.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됐던 장면이었다”라며 웃었다.
도쿄올림픽과 VNL 등 국가대표 경험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정지윤은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술적·정신적으로 많이 배웠던 시간이었다”면서 “특히 라바리니 감독님을 통해 배구에 대한 열정과 마인드를 배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올 시즌 윙스파이커로서의 성장 욕심을 피력했다. 그는 “팀 우승 목표는 당연하다”면서 “개인적으론 레프트라는 새로운 포지션에서 조금 더 적응한 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드리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