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탈탈’, 힘찬 시동과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는 경운기가 간척지 농로를 거쳐 바다로 나간다. 간월암 부근에서 대열을 형성한 경운기 부대가 경쟁하듯 갯벌로 질주한다. 갯벌 한가운데에서 경운기 소리가 멈추고, 조개를 캐는 아낙의 노랫가락이 잔잔히 퍼져나간다. 지난 9월 유튜브에 올려 약 3,470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서산 매드맥스’의 주요 장면이다. ‘서산 갯마을’은 그렇게 다시 한번 서해안의 대표 이미지로 각인됐다.
그러나 지난 7월 ‘한국의 갯벌’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충청남도의 갯벌은 서산이 아니라 서천에 있다. 상대적으로 훼손이 덜하고 새들의 먹이가 풍부해 ‘지구상의 생물 다양성 보전을 위한 중요한 서식지’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서천 맨 아래 장항송림에서 마량리 동백나무숲까지 ‘서천갯벌’을 따라간다. 서천에서도 옛 비인현에 속했던 지역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 광활한 갯벌 뒤로 떨어지는 노을과 갯마을 풍광이 겨울 감성을 자극하는 곳이다.
100m 높이의 거대한 바위산에 내리꽂히듯 우뚝 솟은 92m 굴뚝, 전망산 옛 제련소는 일제강점기 공업 도시로 형성된 장항의 상징적 풍경이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마주 보고 있는 지점이다.
전망산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대규모 솔숲이 나타난다. 해안선을 따라 1.5㎞ 이어지는장항송림이다. 1954년 장항농고(현 장항공고) 학생들이 방풍림으로 심은 1만2,000그루 곰솔(해송)이 울창한 숲으로 성장해 지역의 명소가 됐다. 솔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숲과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솔숲 바닥에는 계절 따라 꽃을 심는데, 지금은 검푸른 솔가지 아래에 맥문동이 녹색의 융단처럼 깔려 있다.
솔숲 가장자리를 따라 높이 15m, 길이 250m의 스카이워크가 설치돼 있다. 해송림을 발아래 두고 서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시설이다. 특히 해 질 무렵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갯벌에 반사되는 노을이 일품이다. 스카이워크는 오후 5시까지 운영(4시 30분 입장 마감)되고 요즘 일몰 시각은 5시 20분쯤이니 해 지는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장항송림 앞바다의 유부도는 서천갯벌에서도 생태적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해안에서 직선으로 약 6㎞ 떨어진 유부도는 바다만큼이나 평평해 육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40여 명이 살지만 정기 여객선도 운행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특별히 요청해야만 어선을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섬이다.
이렇게 단절된 덕분에 섬 주변에 드넓게 펼쳐진 갯벌은 100여 종 희귀 철새의 낙원이 됐다. 장거리 이동하는 철새들이 모래갯벌에 풍부한 조개를 먹기 위해 쉬었다 가는 중간기착지다. 검은머리물떼새, 붉은어깨도요와 같이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이 적색목록으로 지정한 철새가 13종이나 발견됐고, 저어새와 황조롱이 등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6종, 천연기념물 9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갯벌의 멋쟁이’라 불리는 검은머리물떼새가 많게는 4,000마리 이상 이곳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새들의 낙원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 둔다.
인간을 위한 편의시설은 예기치 못한 변화를 낳기도 한다. 장항송림 북측 해변에는 사각형의 대형 모래 포집 장치가 설치돼 있다. 이곳은 한때 서천 주민들이 모래찜질을 즐기던 송림해수욕장이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음력 4월 20일을 ‘모래의 날’로 지정하고 축제를 열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 금강하구둑을 완공한 이후 모래가 줄어 송림해수욕장이라는 명칭도 사라지고, 모래찜질의 추억도 희미해지고 말았다. 좁아진 모래해변 너머로 그만큼 넓어진 갯벌이 펼쳐진다.
장항송림 앞바다는 오랜 옛날 기벌포해전이 펼쳐진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676년 신라와 당나라가 금강 하구인 기벌포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된다. 22회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당나라는 상당수의 전함과 4,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전해진다.
서천군의 해안선은 장항읍, 마서면, 종천면, 비인면, 서면 등 5개 읍·면에 걸쳐 72.5㎞에 달한다. 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갯벌도 모래갯벌, 펄갯벌, 혼합갯벌, 자갈갯벌 등 다양한 지질 형태를 띠고 있다.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갯벌은 철새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든든한 삶의 터전이다.
갯마을 어귀마다 바다로 가는 길이 희미하게 이어진다. 조개잡이 가는 어민들의 출퇴근 통로다. 지난 10일 오전 마서면 송석항, 바퀴가 큰 트랙터가 먼바다 양식장에서 김을 수확해 온 배로 접근해 부지런히 육지로 옮기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경운기 2~3대가 찰랑거리는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때가 되자 드디어 시동을 건 경운기가 조심스럽게 물살을 헤치며 바닷길로 이동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10대의 경운기가 뒤따른다. 바닷길을 찾은 경운기 행렬이 점점 속도를 내더니 넓어진 갯벌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서천 매드맥스’다.
물기가 촉촉하게 남아 있는 갯벌 한가운데에 경운기를 세우고, 어민들은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조개잡이는 물 빠진 5시간 동안 계속된다. 요즘 서천갯벌에서 가장 흔한 조개는 동죽이다. 4~5월에는 바지락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태풍이 불고 바다가 한번 뒤집히면 종류가 달라지기도 한다니 고정된 건 아니다. 철새의 낙원 유부도 인근에선 조개 중에서도 고급으로 치는 백합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진정한 미식가는 철새인 셈이다.
송석항 반대편 해안 끝자락에 매바위공원이 있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삼각김밥 형태로 삐죽하게 생겼는데 이름은 그대로 매바위다. 바위 주변 동그란 해안을 따라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들어가는 길이 다소 불편하고 마을에서도 멀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쓸쓸하면서도 가슴 후련한, 광활한 갯벌과 겨울 바다가 풍기는 묘한 정취에 끌린다.
공원 좌우 갯벌에도 끝 모를 바닷길이 이어지고, 어김없이 경운기 행렬이 줄지어 있다. 마침 날씨까지 흐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갯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경계가 모호한 가운데서도 이따금씩 구름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에 회색빛 갯벌의 끈적한 질감이 윤곽을 드러낸다. 바람은 쓸쓸하고 차가운데 마음은 질펀한 갯벌처럼 풍족하다.
선도리갯벌체험마을 인근 바다에 작은 섬이 하나 보인다. 물이 빠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할미섬이다. 굴 껍질이 가득 쌓인 길을 통과해 바위섬을 지나면 의외로 아기자기한 풍광이 펼쳐진다. 굴 딱지를 가득 뒤집어쓴 바위 군상이 금강산의 축소 모형이라 해도 될 정도로 기묘하다. 바위 끝에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을 가둬 고기를 잡던 독살도 남아 있다.
선도리갯벌체험마을 역시 노을을 보기 좋은 곳이다. 마을 앞 2개의 작은 섬(쌍섬)까지 길이 연결돼 있어서 바다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해 질 무렵 갯골 사이로 노을이 번지면 풍성한 갯벌의 살점이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햇빛과 갯벌이 빚은 풍경화다. 해안에도 넓은 공원이 조성돼 있어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해변 남쪽 끝 작은 바위섬에는 소나무 세 그루가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을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당섬으로 부르는데, 소나무 뒤로 떨어지는 일몰이 또 장관이다.
선도리 인근 띠섬목은 서천의 숨겨진 해수욕장이다. 짧은 비포장도로를 통과하면 하얀 백사장이 3㎞ 이상 길게 펼쳐진다. 사람 발자국 대신 하얀 조개 껍질이 촘촘히 박혀 별처럼 반짝거린다. 들어가는 길과 해변을 제외하면 주변이 모두 사유지여서 개발이 여의치 않은 곳이다. 오래도록 서천의 미래 자산으로 보존될 듯하다.
띠섬목 해변이 길게 휘어져 만을 형성하고 있는 마량포구는 해넘이와 해돋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제법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한국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1816년 영국 해군 2척이 서해안을 탐사하던 중 마량포구 인근에서 표류한다. 이때 비인 현감 이승렬과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 알세스트호의 맥스웰과 리라호의 바실홀 함장과 만나 ‘킹 제임스 성경’을 건네받는다. 조선 왕실의 ‘일성록’과 바실홀 선장이 쓴 ‘조선 서해안과 유구(오키나와) 항해기’로 확인된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마량포구에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 기념공원이 조성되고, 포구 위 언덕에는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의 상황과 1611년 출간된 킹 제임스 성경 원본이 전시돼 있다. 미국 피닉스의 고(古)성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진품으로 3억원을 들여 구입했다. 4층 예배당의 자연 채광을 활용한 십자가는 방문객들 사이에 포토존으로 인기다. 맞은편 유리창으로 보이는 바다에 십자가가 솟은 것처럼 반사되기 때문이다.
마량포구에서 뒤편으로 돌아가면 196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 있다. 500년 수령의 동백 80여 그루와 후계목이 언덕을 가득 덮고 있다. 3월이 절정이라는데 이미 몇 그루는 붉은 꽃을 피웠다. 언덕 꼭대기 동백정에 오르면 바로 앞 오력도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이 아름답다. 바로 옆에 있어서 눈에 거슬렸던 화력발전소가 현재 철거 중이다. 장차 주변 해안 풍광도 옛모습을 되찾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