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7일 독재자 아버지의 급사로 27세 젊은이가 권좌에 올랐다. 어린 독재자는 국제사회의 우려 섞인 시선에도 10년을 너끈히 버텼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며 줄곧 개혁도 부르짖었다. 하지만 반(反)개혁은 여전히 강고했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사자가 속출한 1990년대를 떠올릴 정도다.
‘김정은의 시간’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10년, 그에게는 독자적 리더십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와 세습의 굴레를 떨쳐내지 못했다는 비난이 혼재한다. 정부 관계자는 13일 “불안한 실험은 진행형”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의 10년을 주요 키워드로 돌아봤다.
김 국무위원장은 선대와 다른, 독특한 통치 스타일을 선보였다. ‘감성’이다. 특히 눈물을 내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난해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정점을 찍었다. 대북제재와 감염병 확산, 수해의 삼중고로 고생하는 주민들에게 눈물로써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실질적으로 향상하는 ‘인민대중제일주의’란 용어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관영매체의 관련 언급은 2013년 14회에서 지난해 76회로 폭증했다.
몸을 낮춘 최고지도자의 ‘애민 리더십’은 다목적 효과를 노린, 계산된 연출에 다름 아니다. 회의 때마다 “인민의 권익을 최우선하라”고 간부들을 질책할 수 있는 동기가 됐다. 특권층엔 경각심을, 인민들에겐 충성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애민 통치가 적극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짧은 후계자 생활로 집권 기반이 미약한 김 위원장에게 ‘1인 지배체제’ 완성은 생존 과업이었다. 그는 ‘시스템 정치’에서 답을 찾았다. 먼저 군에 과도하게 쏠렸던 권력을 당정에 고루 분산시켰다. 이어 노동당 중심으로 각급 회의체를 운영해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성과를 독려했다. 그 결과, 당이 군부를 압도하는 ‘선당(先黨)정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80년 이래 35년간 열리지 않았던 당대회는 2016년 제7차 대회부터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고 있다. 집단지도체제의 외형을 갖춰 독재 의심을 피하면서도, 김 위원장이 사실상 쥐락펴락하는 당 체제 완비를 통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틀어쥔 것이다.
군부 길들이기도 1인 체제를 뒷받침했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운구차를 호위한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은 자취를 감췄고, 고모부 장성택은 처형됐다. 누구든 작은 권력을 가질 조짐만 보여도 가차 없이 싹을 자르겠다는 협박이었다. 김 위원장은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체제도 기존 3인에서 5인(김정은ㆍ최룡해ㆍ조용원ㆍ김덕훈ㆍ박정천)으로 확대해 최고인민회의(국회), 내각, 군부 인사권을 모두 손에 쥔 데 이어, 1월 8차 당대회에선 선군정치 용어도 헌법에서 빼버렸다.
그는 집권 5년차인 7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홀로서기’의 내실을 갖춰 나갔다. 주로 선대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도 이때부터 사용됐다.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할아버지ㆍ아버지 반열로 격상한 것이다. 과거 흔적 지우기에도 매진해 같은 해 6월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김정일 시대 최고통치기구였던 국방위원회를 폐지했다. 대신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국무위원회를 신설하고, 대외적인 국가수반의 자격을 얻었다. “북한도 정상국가를 지향한다”는 제스처였다. 1월 8차 당대회에서는 헌법상 김정일에게 영구 부여했던 총비서 직책 역시 획득해 ‘김정은의 북한’을 대외에 거듭 각인시켰다.
올 들어서는 ‘김정은주의’라는 독자적 사상체계, 우상화 작업에도 착수했다. 노동신문은 4, 5일 열린 군사교육일군대회 소식을 전하며 김 위원장을 “탁월한 스승”으로 묘사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사상적 지도체계를 선대와 차별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주체’, 김정일의 ‘선군’에서 독립해 김정은 시대를 관통하는 이념 정립에 골몰하고 있다는 얘기다.
집권 10년의 최대 결실은 역시 핵 전력의 비약적 발전이다. 실전 가능한 전략무기체계를 개발하겠다는 그의 집념 덕에 북한의 핵ㆍ미사일 능력은 진일보를 거듭했다. 김 위원장은 2013년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을 채택, 핵을 갖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한 끝에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핵은 김 위원장에게 좋은 협상 매물이었다. 그는 2018년 1월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며 미국을 대놓고 협박했다. 뒤이은 핵 협상은 대북제재 완화를 유도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노림수가 분명했다. 2018년 6월 사상 첫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까지, 그의 도박은 거의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 빈손 합의에 그쳤다. 협상 결렬에도 북한의 국방력 강화 기조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거꾸로 핵과 경제를 맞바꾸려던 김정은식 담판 외교의 실패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고립은 심화됐고,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북미관계 악화는 남북관계에까지 도미노 경색을 불러 인도적 지원 통로마저 막혀 버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북한은 ‘자력갱생’를 외치는, 폐쇄 사회로 회귀했다.
악재는 겹쳤다.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출범으로 비핵화 논의는 아직도 협상 테이블조차 꾸려지지 않았다. 핵 무력을 한층 더 가다듬으려면 경제적 고난을 계속 감수해야 하고, 국가경제를 살리자니 핵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경제만 놓고 보면 김정은의 10년은 실패”라고 단언하면서 “다음 행보는 핵과 경제 사이의 근본적 모순을 푸는 새 전략을 짜는 데 할애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