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원에서 논문 개요에 대해 발표했을 때다. 한 영화 전공 교수가 “‘괴물’(2006)은 제작비로 봤을 때 독립 영화인데, 왜 블록버스터라고 표현하냐”고 질문을 던졌다. “제작비 110억 원이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답변했으나 교수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블록버스터라고 하면 1억 달러 이상 들어간 할리우드 대작을 주로 떠올리니 오해할 만도 했다.
제작비 100억 원대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저예산 영화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한국에선 제작비가 100억 원 이상이면 대작 수식이 따라 붙는다. 제작비가 200억 원을 넘으면 과연 극장에서 회수 가능한가 의문이 제기된다. 내수시장만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극장에서 500만 명 이상이 봐야 손해를 안 본다.
내수시장에 한계가 있다면 수출로 돌파구를 뚫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은 한한령으로 아예 한국 영화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세계 2위 시장인 미국에 판로를 확보하려면 일단 거액이 필요하다. 미국에선 저예산 영화가 전국 단위로 개봉하려면 마케팅 비용만 2,000만 달러가량 든다. 블록버스터의 경우 마케팅 비용으로 1억5,000만 달러 이상은 쓴다. 제작비가 200억 원대인 ‘모가디슈’(2021) 같은 영화 7, 8편을 만들 돈이다. 한국 영화는 몇 개 극장에서만 선보이는 식으로 시장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기생충’(2019)도 처음엔 극장 3곳에서 개봉한 후 입소문을 바탕으로 상영관을 늘려 나가는 전략을 택했다. ‘1인치 자막의 장벽’ 역시 만만치 않지만 시장 진입 장벽은 더 높고도 높다. 한국 영화 완성작의 1년 수출액이 3,787만7,316달러(2019년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불과했던 이유다.
황동혁 감독과 연상호 감독이 각기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 잇달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에서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러 분석이 뒤따르고 있다. 한국 콘텐츠의 우수성과 한류의 저변 확대 등이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틀린 분석은 아니나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한국 영화 ‘파이란’(2001)이 지난달 개봉 20주년을 맞아 극장을 다시 찾았다. 문득 2001년에 어떤 한국 영화들이 상영됐나 살펴봤다. ‘친구’와 ‘조폭마누라’ ‘신라의 달밤’ 등이 관객몰이를 했다. ‘봄날은 간다’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고양이를 부탁해’ 등은 흥행에 크게 성공하진 못했으나 영화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년 전에도 한국은 지금 못지않게 상품성이 좋거나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산업적 토양 위에서 황동혁 감독과 연상호 감독이 데뷔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방송 드라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 국가 국민들 사이에서 아직도 입에 오르내리는 드라마 ‘허준’은 1999~2000년 방송됐다. 한류 드라마 ‘대장금’은 2003년 첫 전파를 탔다.
유통 질서의 급변을 주목해야 한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단번에 전 세계 시청자에 닿을 수 있는 콘텐츠 유통 초고속망이다. 극장처럼 상영 배정 시간이 필요 없고, 방송국처럼 편성 경쟁을 할 이유가 없다. 국내 콘텐츠 회사들의 해외 OTT 종속 우려가 있지만,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 열어젖힌 기회의 문은 넓고도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