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누명 소년의 잃어버린 10년… 책임자들,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입력
2021.12.13 04:30
7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그후>
강압수사 경찰 "유죄 정황" 발뺌 여전
경찰 퇴임 후엔 지방선거 출마하기도
살인죄 기소한 검사는 로펌 변호사로
경찰 수사 막은 검사는 정부기관 파견
유죄 선고 판사들 현직·김앤장서 활동
김훈영 검사만 피해자 찾아 직접 사과

“나는 살인범이 아닙니다.”

15세 소년이 살인 누명을 쓴 채 꼬박 10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스물다섯 청년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국가는 수차례 그의 말을 외면하고 묵살했다. 억울하다고 말하면 반성하지 않는 놈으로 매도당했고,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말하면 거짓말로 치부됐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도, 정의 구현자라는 검사도, 최후의 양심이라는 판사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돈 없고 백 없는' 10대 소년은 그렇게 살인범이 돼버렸다. 2000년 발생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으로 누명을 쓴 최모(36)씨 이야기다.

최씨의 억울한 옥살이 뒤편엔 수많은 '책임자'들이 있었다. 가혹 행위로 거짓 자백을 강요했던 경찰, 잘못된 경찰 수사를 바로잡기는커녕 부당한 수사 지휘를 했던 검찰, 최씨의 호소를 외면하고 중형을 선고했던 법원. 그들의 무능과 실수, 냉대와 오만이 켜켜이 쌓여 한 소년의 인생을 짓밟아버렸다.

물론 최씨를 도왔던 소중한 이들도 있었다. 무고한 소년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다 좌천당했던 경찰관, 청년이 된 최씨의 재심을 도운 변호사와 언론인도 있었다. 2016년 최씨가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되자 경찰과 검찰, 법원은 일제히 기관 차원에서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수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개인들은 조직의 그늘에 숨은 채 누구도 과오를 고백하며 사죄하지 않았다.

목격자가 유력 용의자로 둔갑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현장을 마주치면서 15세 최군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찍부터 배움을 접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최군은 그날도 다방 배달 일을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약촌오거리 부근을 우연히 지나던 그는 사건 현장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목격자'였다.

그러나 사흘 뒤 익산경찰서 형사들은 그를 숨진 택시기사 유모(사망 당시 42세)씨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긴급체포했다.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유씨는 흉기에 12차례나 찔렸지만 최군의 옷과 신발은 물론이고 흉기로 지목된 다방 식칼에서도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가혹행위를 통해 최군으로부터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반장 이모씨 등 익산서 경찰들은 소년을 여관과 경찰서 등에서 수시로 때리고 사흘 넘도록 잠을 재우지 않았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뺨과 뒤통수를 후려치고, 대걸레 자루를 휘둘렀다. 최군은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고문에 가까운 경찰의 강압 수사를 못 이기고 최군은 결국 “내가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최군의 진술 내용은 사체 감정 결과와 현장 검증 결과 등 새로운 수사 내용이 드러날 때마다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가 범인이 되려면 그래야만 했다.

경찰과 검사, 판사와 국선 변호사도 외면

경찰 수사도 문제였지만, 엉터리 수사 결과를 걸러내지 못한 검사와 판사의 책임도 가볍지 않았다. 위법한 수사 정황이 있었고 증거도 충분치 않았는데도 사건을 넘겨받은 전주지검 군산지청의 김모 검사는 제대로 된 보강수사도 없이 최군을 기소했다. 1·2심 법원 역시 유력한 목격자를 증인신문하지 않는 등 무성의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보살핌 없이 자랐고, 지독히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던 최군의 호소를 검사와 판사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2001년 2월 1심 재판부는 최군에게 당시 소년법 기준으론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실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여건이 안 됐던 그는 법정에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호소하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판사의 눈엔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비쳤을 따름이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자, 그는 자포자기했다. 2001년 5월 항소심에서 최군은 "감형이라도 받자"는 국선 변호사의 회유로 결국 혐의를 인정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상고도 포기해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진범 나타나 누명 벗을 기회 있었지만…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2003년 6월, 복역 중이던 최군에게 누명을 벗을 기회가 찾아왔다. 군산경찰서는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재수사에 나섰다. 군산서 소속 황상만 형사반장은 진범 김모씨의 친구였던 임모씨로부터 “사건 당일 김씨가 피 묻은 흉기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택시기사를 공격했다고 말했고, 내가 흉기를 숨겨줬다”는 취지의 진술을 받았다.

경찰은 이 진술을 바탕으로 6월 5일 김씨와 임씨를 긴급체포했다. 하지만 이틀 뒤 경찰 수사를 지휘한 정모 검사가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면서 이들은 곧바로 풀려났다. 김씨와 임씨는 이후에도 반복해서 범죄사실을 자백했지만, 정 검사는 줄곧 보완수사를 주문했고, 택시기사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진짜 흉기’를 찾기 위한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도 기각했다.

수사가 지연되자 진범 김씨와 임씨는 함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가족 관심을 받으려고 꾸며냈던 이야기’라며 경찰 진술 내용을 번복했다. 하지만 황상만 반장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해 7월 21일 경찰은 두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접수하지 말라”는 정 검사의 구두 지시를 받게 된다. 사실상의 수사 중단 지시였다.

군산경찰서 캐비닛 속에 3년간 방치됐던 사건은 결국 2006년 4월 진범 김씨에 대해 ‘혐의 없음’ 의견이 붙은 채 검찰에 송치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전주지검 군산지청의 김훈영 검사는 옥살이 중이던 최군과 진범 김씨를 불러 대질조사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고, 김훈영 검사는 경찰 의견대로 진범 김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3명의 검사는 실체적 진실을 밝혀낼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최군을 구해내지 못했다. 김 검사는 2000년 아무 잘못도 없는 최씨를 경찰 의견대로 기소했고, 정 검사는 2003년 부적절한 수사 지휘로 경찰 수사를 막았다. 김훈영 검사 역시 2006년 진범에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그때 그 검사와 판사들 어떻게 지내나

2010년 2월 26일, 10년을 거의 채우고 3.1절 가석방으로 출소한 최씨는 박준영 변호사의 설득으로 2013년 4월 재심 법원 문을 두드렸다. 광주고법은 2016년 11월 사실상 ‘유일한 증거’였던 최씨의 자백이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 진술일 가능성이 크다며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바로 그날 경찰은 진범 김씨를 긴급체포했고, 강도살인죄로 구속기소된 김씨는 징역 15년을 확정받아 복역 중이다.

잃어버린 10년의 시간 동안 소년의 인생은 철저히 파괴됐지만, 그는 지금껏 누구한테도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잘못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최씨는 국가와 익산경찰서 이모 반장, 김훈영 검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올해 1월 승소한 뒤 항소심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김훈영 검사와 달리 이모 반장은 최근까지도 “경찰이 송치했을 당시 검찰과 법원 모두 유죄로 판단할 만큼 충분한 정황이 있었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씨 수사에 재판에 관여했던 검사와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진범을 잡으려는 재수사를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정모 검사는 최근까지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로 재직하다가 현재는 정부 기관에서 파견 근무 중이다. 최초 수사 때 경찰 의견 그대로 최군을 기소했던 김모 검사는 현재 서초동의 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강압 수사를 주도했던 익산경찰서 이모 반장은 퇴직 후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잘못된 판결을 내린 판사들도 수도권 법원에 현직 법관으로 재직 중이거나, 김앤장 등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최씨를 살인자로 몰아붙인 그때 그 판사와 검사, 경찰 대부분이 아무 일 없었던 듯 잘 지내고 있는 셈이다.

수많은 책임자 가운데 진범에 무혐의 처분을 내린 김훈영 검사만이 최씨를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재심을 통해 결과가 뒤집힌 뒤 기관 차원에서 사과한 적은 있었지만, 검사 개인이 언론을 통해, 그리고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사과하기는 김훈영 검사가 처음이다. 박준영 변호사는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때로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김훈영 검사의 용기 있는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