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소녀, 슈퍼 커브 타고 인생이 바뀌었다

입력
2021.12.11 10:00
19면
<65> 왓챠 '슈퍼 커브'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애니메이션 '슈퍼 커브'의 첫 화 제목은 '아무것도 없는 소녀'다.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코구마는 말한다. 나에게는 부모도, 돈도, 친구도, 취미도, 장래 희망도 없다고. 어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입학 무렵 사라졌다. 코구마는 혼자 시영 주택에서 살아간다. 점심은 밥만 싸가서, 레토르트 카레를 부어 먹는다. 교실 뒤에 전자레인지가 있지만, 점심이 되면 다들 사용하고 있어서 그냥 차갑게 먹는다. 주장하지 않고, 나서지 않고, 함께하지 않는 코구마의 지금은, 아마 미래도 그저 조용할 뿐이다. 매일 학교에 가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통학 길에는 언덕이 있다. 힘들게 페달을 밟아야만 오를 수 있다. 교실에 앉아 창밖을 보던 코구마의 눈에 언덕을 오르는 바이크가 보인다. 코구마는 충동적으로 바이크 판매와 수리를 하는 가게에 간다. 가격을 물어보았지만, 가난한 코구마에게는 중고조차 어림도 없다. 그러자 주인은 안에서 바이크 하나를 가지고 나온다. 혼다의 슈퍼 커브. 단돈 1만 엔이다. 지나치게 싼 이유가 있다. 이전 세 명의 주인에게 모두 불상사가 있었다는 사고물건. 경제적 여유가 없는 코구마는 누구나 꺼릴 슈퍼 커브를 선뜻 구입한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


'슈퍼 커브'의 원작은 2017년에 나온 도케 고겐의 소설이다. 이어서 만화도 나왔고, 애니메이션은 2021년 4월에 일본에서 방영했다. 감독은 '나루토'의 후속편 '보루토'를 연출했던 후지이 도시로. '슈퍼 커브'는 여고생이 바이크를 타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해가는 이야기다. 바이크 하나로 뭐가 달라지냐 생각하겠지만, 개인의 일상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때로는 단 하나의 물건이나 사소한 발상, 습관만으로도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이제 코구마는 슈퍼 커브를 타고 통학을 한다. 수월하게 언덕을 오를 수 있다. 바이크를 탄다는 것은 단지 오가는 길이 편해진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코구마의 일상은 틀 안에 존재했다. 학교와 동네 슈퍼 정도. 해가 지면 늘 집에만 있었다. 슈퍼 커브를 구입하고 처음 했던 파격은 밤에 편의점을 가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며 멀리 있는 대형 슈퍼에 가 본다. 늘 먹는 레토르트 카레도 싸게 팔고 있다. 더 많은 식재료가 있다. 코구마는 생각한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조금씩 몸의 무엇이, 일부분이 바뀐다고.


단지 편리함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약을 위해서라도 간단한 정비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 오일도 직접 간다. 겨울이면 월동 준비도 해야 한다. 보온용 재킷과 장갑을 마련하고, 바람을 막을 윈드 실드도 있어야 한다. 시간을 들여 미리 준비를 해야만 안전하고 쾌적하게, 한 계절을 보낼 수 있다. 비용이 들기 때문에 알바도 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세상에 없다.

1시즌의 마지막, 성장한 코구마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없던 내 삶이 조금은 바뀌었다... 가만히 있으면 커브는 구해 주지 않는다. 아마 스스로 뭔가를 원해야 할 것이다... 뭐든지 할 수 있는 마법의 기계가 아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맞서고 뭔가를 이루려 할 때 분명히 내 편이 되어줄 거다.' 아무것도 없었던 소녀는, 슈퍼 커브를 자신의 삶에 들여놓고 난 후 변화한다. 성장한다. '슈퍼 커브'는 코구마와 친구들이 일상의 작은 변화를 통해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레이코는 코구마에게 처음 생긴 친구다. 슈퍼 커브를 자랑하고 싶지만 아무 말도 못하는 소심한 코구마에게 레이코가 다가온다. 이유는 하나. 레이코도 슈퍼 커브를 타고 있으니까. 슈퍼 커브와 함께한 후에 삶이 바뀌었으니까. 코구마의 슈퍼 커브를 보고 감탄하고, 자신의 슈퍼 커브를 보여주고, 함께 장비를 사러 간다. 취미는 단지 즐기는 것만이 아니다. 취미를 통해서 생각이, 행동이 변한다. 레이코는 여름에 산을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후지산에 가서, 개조한 슈퍼 커브로 산을 오른다.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결국 다 오르지 못했지만 레이코는 만족한다. 해 봤으니까, 도전했으니까.

코구마도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가마쿠라로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열이 심하게 오른 코구마는 불참하겠다고 연락했다. 하지만 일어나보니 말짱해졌다. 고민하던 코구마는 슈퍼 커브를 타고 가마쿠라에 가기로 결정한다. 처음 가는 장거리 여행. 코스를 점검하고, 소요 시간을 재며 가 보고 싶었던 코스를 달린다. 자신이 결정하고, 슈퍼 커브로 달리고, 모든 결과의 책임을 스스로 진다. 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슈퍼 커브가 생기며 친구를 만났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슈퍼 커브' 초반의 코구마는 지극히 소심하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필요한 것이 있어도 찾아가지 않는다. 이어지는 일상의 반복만을 할 뿐이었다. 슈퍼 커브와 함께하면서 코구마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새로운 공간을 만나고 경험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말하게 된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한다. 원래 코구마의 성격은 그랬을 것이다. 주관이 확실하고, 말보다 행동을 하는 것.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기에 스스로 위축되어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슈퍼 커브를 만나 일종의 리미트가 해제된 후, 코구마는 자립적으로 살아간다. 나서지는 않아도 명확하게 의견을 말하고, 함께 살아간다.

부모님이 카페를 하는 시이는 코구마와 레이코를 동경한다. 학교 축제에서 카페를 했던 시이는 코구마와 레이코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후 시이는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일단 부모님의 카페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독일식 빵을 만드는 아버지, 미국식 카페를 원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시이는 이탈리아 커피와 디저트를 만든다. 그리고 '리틀 커브'를 구입한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서, 함께 가고 싶어서. 그런데 시이의 마음을 알게 된 코구마는 다른 생각이었다. 시이는 언제나 갈 곳을 알고 있었고, 뒤쫓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다만 슈퍼 커브로 자신의 행적이 쉽게 드러났을 뿐. 삶의 모든 것을 바꾸려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취미 하나가 생기면서, 서서히 인생의 길이 변해간다. 시이도, 코구마의 미래도 변할 것이다.


'슈퍼 커브'는 성장물이며, 청춘물이고, 일상물인 동시에 힐링물이다. 슈퍼 커브로 삶이 변해가는 여고생들의 일상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일본에서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 같다는 평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슈퍼 커브'가 2017년 혼다 슈퍼 커브의 총생산 1억 대 기념으로 기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상품 광고를 너무나 조잡하게 삽입해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한데, '슈퍼 커브'처럼 만든다면 언제든 '광고'를 봐 주고 홍보에 앞장설 용의도 있다. 당장 '슈퍼 커브'를 보고, 나도 슈퍼 커브가 어떤 제품인지, 얼마인지 검색하고 있으니까.

김봉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