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거의 영웅이 될 뻔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건강마저 성치 못하게 되자, 마치 더는 잃을 것이 없다는 듯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불만을 감히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욥 21:7-9) 욥의 이 불만은, 어려움이 닥쳐 마구 내뱉은 내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신의 부조리에 대하여 평소에 생각해 온 바다. 배부르고 등이 따습고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도 드리던 때에는 고난이 닥쳐도 그 불만을 발설하지 않았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1:22) 그러나 실질적 복락을 잃자 그는 돌변했다.
인간은 누구든지 신이나 세상의 부조리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 의구심을 덮을 만한 삶의 행복과 여유를 누리면 이것은 그저 사념의 차원에만 머문다. 감히 절대자에게 그런 불만을 터뜨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근히 욥을 응원한다. 자기 대신 하나님께 실컷 대들어 주기 때문이다. 욥의 외침을 들어보자. "성읍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신다."(24:12) "주님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님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16:8)
이런 욥이 하나님께 항거하다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거나 혹은 고난의 잿더미에서 평생 고뇌를 곱씹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사람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욥을 내심 응원했던 이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뒤통수를 크게 맞는다. 하나님께 욥은 다시 순종하고 또다시 엄청난 복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엄청난 물질적 복을 주고 욥은 덥석 그 복을 받는다.
욥의 시대에는 인간의 신심과 현세의 복이 정비례한 세계였다. 정통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다소 달랐다. 욥에게는 '잘 믿으면 복 받는다'가 정통이었다. 이런 기복신앙을 소위 신앙이 고매한 분들은 싫어한다. 마치 거래하는 듯한 기복신앙을 저급한 수준의 미신쯤으로 여긴다. 그런데 기복이 정말 저급한 것일까?
세상의 어떤 인생도 복 받기를 원치 않는 자는 없다. 누구든 무탈하고 평온하며 넉넉하게 살고 싶어 한다. 신앙이 그저 복 받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삶이 더 복되기를 바란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리고 욥기의 결말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기복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슈퍼 고매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없다. 역사에 남을 성인도 죽으면 적어도 천국에 간다는 보장은 받아 놓고 헌신한 것 아닌가? 사실 다 계산을 마친 후 뛰어들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지만 인간은 절대 조건적이다. 성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한 인간일 뿐이다. 욥기는 신심과 기복의 밀접한 결부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한다. 사람은 복 받기를 바라는 실존적 필요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 사람에게 복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 삶의 조건에서 기복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대단한 실수다. 누구든지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며, 이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복을 누릴 조건을 부당하게 짜깁기하여 남이 정당히 누릴 복마저 탈취하려는 것은 큰 죄다. 그리고 결국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자기 복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험해지기 때문이다. 욥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