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개최 예정이었던 세계무역기구(WTO) 제12차 각료회의가 코로나바이러스 변종인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급작스럽게 무기한 연기되었다. 내년 3월 초에 다시 여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으나 실제 열릴지는 미지수이다. 오미크론의 치사율이 어느 정도인지 그때 가면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은 없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료회의 개최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WTO 다자체제에 대한 개혁 논의는 오히려 활발해질 전망이다. WTO체제의 개혁 없이 현 상태로는 더 이상 협상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WTO 개혁 논의가 자칫 또 다른 미중 대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새로운 라운드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최근 일반이사회 카스티요 의장이 제시한 비공식 문서는 이러한 우려를 갖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통상 일반이사회 의장은 각료회의를 앞두고 각료들의 합의 도출을 돕기 위해 그때까지 논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비공식 문서를 배포해 왔다. 이번 문서도 그와 같은 성격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배경을 곱씹어 생각하면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우선 WTO 개혁과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인 분쟁해결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해당 문서는 분쟁해결 기능이 완전하고 적절히 작동되도록 협상을 계속한다고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논란의 핵심인 상소기구 문제는 언급 없이 피해 갔다. 이런 가운데 상소기구의 행태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이 WTO개혁을 통해 상소기구를 없애고 패널심만 있는 단심제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안 소송으로 가기 전에 중재를 통해 대부분의 분쟁이 해결점을 찾는다면 단심제도 가능하다는 논리다. 단심제가 되면 미국이 가장 문제시해 왔던 상소기구에 의해 패널심이 뒤집히는 경우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카스티요 의장이 이런 미국의 입장을 감안해 분쟁해결제도를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향후 분쟁해결제도가 개혁된다고 해도 단순히 이전 상태로의 복귀는 어렵고, 경우에 따라 큰 변혁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개도국 우대에 관해서도 이의 적용을 제한하려는 미국, EU 등 선진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 개도국 우대 적용을 개선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어떤 식으로 개선될지 불확실하지만 자기 스스로 개도국임을 선언하면 자동적으로 개도국으로 인정되는 현행 방식에 변화가 올 것은 분명하다. 향후 합의된 기준(예 1인당 GDP)을 적용해 개도국을 졸업시키는 방식이 도입된다면 그 일차적 대상은 중국 등 일부 개도국이 될 것이다.
그 외 협상 기능의 회복과 협상 촉진을 위해 다자방식에서 벗어나 복수국 간 방식을 활성화시킨다고 해석될 수 있는 내용도 있으며, 개혁 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 실무그룹을 설치하고 차기 각료회의에서 적절한 결정을 내린다는 내용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차세대 신통상 이슈인 디지털 무역과 함께 기후변화와 무역, 여성과 무역도 포함되어 있어 여태껏 진전이 없는 의제가 여기에 추가될 경우 차기 각료회의에서 이러한 의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라운드도 출범할 수 있겠다는 인상도 받는다. 존재감 없는 WTO 다자협상에 눈에 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