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도 여러 풍경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회사 선배가 목발을 집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지난밤 송년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의 오른발에 붕대가 칭칭 감겼다. 정황상 어젯밤 몇몇이 따로 가진 2차 모임에서 사달이 난 거였다. 선한 그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하는 걸 재빨리 포착했다. 커피 두 잔을 내려 회의실로 향하는 내 뒤를 그가 따라붙었다. "싸웠어." 그의 첫마디였다. 우리 회사 송년 모임에 왔던 이웃 회사 사장이랑 한판 붙었다고 했다. "그래서 선배는 그놈 다리몽둥이라도 분질러놨어요?" 간혹 스치는 것만으로 기분 잡치곤 하던 이가 싸움 대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묘한 투쟁심이 솟구쳤다. "그 자식이 복싱을 배웠나 봐. 나한테 주먹을 날리길래 테이블에 있던 상아 재떨이로 막았는데, 그놈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어. 손등에서 피가 나더라고."
그쯤에 이르러서야 마흔 살 넘은 멀쩡한 남자들이 어쩌다 육박전을 벌인 건지 궁금해졌다. 지난밤의 감정이 살아나는 듯 얼굴이 벌게져서 쏟아내는 말을 듣다가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그러니까 선배가 이미 여러 해 전에 차장으로 승진한 사실을 뻔히 아는 상대가 말끝마다 '임 대리, 임 대리' 부르며 부아를 돋웠다고 했다. 어금니를 깨물며 한 시간쯤 참다가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려차기를 했고, 술자리는 곧장 개싸움판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발목을 다친 건 첫 돌려차기 후 착지가 불안정했던 탓이라고 했다. 한참을 깔깔거렸지만, 이 일은 성인이 된 후 내가 들은 가장 이상한 싸움으로 각인됐다.
한데 하찮은 이유로 싸움을 해대는 건 모든 걸 다 가진 신들도 매한가지였다. 초판이 나오고 10년 넘도록 듬직한 판매량을 보이며 황소자리의 효자가 된 책 중 '켈트 신화와 전설'이 있다. 최근 이 책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새삼 알았다. 정반대 성향을 지닌 바다의 신(어둠)과 땅의 신(빛)들은 서로 혼인하고 기예를 전수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던 그들이 느닷없이 퇴로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상대가 차린 잔칫상이 초라해서 혹은 자기 연인의 미모에 반한 상대 장수의 수작질이 '심한 모욕감'을 줬다는 이유로 발화된 싸움은 매번, 세상 만물을 전멸케 하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당에서 또 하나의 희한한 싸움을 봤다. 첫 펀치를 낸 건 우리 테이블 왼쪽에 앉은 여성이었다. "사람들 참 멍청해. 이재명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자기 관리를 해온 사람이야. 그런 이가 대장동 비리 같은 데 연루됐을 거라고 믿어?" "내 소원이 뭔지 알아? 대통령하고도 맞짱 뜰 만큼 대찬 윤석열이 당선돼서 이재명이의 가증스러운 실체를 확 드러내는 거야." 오른쪽 남자가 받아치며 화력이 거세진 말싸움을 중간에 앉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돌려차기를 하든 쇠스랑으로 찌르든, 그들끼리 육박전 벌이는 꼴을 보고 싶어진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고 나왔다. 한판 개싸움을 기대했건만, 그들은 고수였다. 언제 언쟁했냐는 듯 태연하게 식사에 열중하는 양 진영을 창밖에서 훔쳐보는데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저들이 핏대를 세운 진짜 이유는 멍청하게 숟가락질만 해대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젠장! 뒤늦은 사태 파악에 머쓱해진 우리는 바보처럼 흐흐,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