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미국 뉴욕 한 유대인 여인의 장례식. 추모사를 하던 랍비가 "저는 이분을 모르지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난달 26일 국내 초연으로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국립극단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첫 장면에 나온 이 대사는, 이 연극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20세기 중반, 미국 이주자, 유대인, 여성. 망자를 규정하는 단어들로 그 인생을 알 수 있겠지만 편견으로 가득 찬 속단일 수도 있다. 연극은 관객이 이런 장벽을 직시하게끔 이끈다.
퓰리처상과 토니상 등을 휩쓴 작가 토니 쿠슈너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91년 초연된 후 30여 년간 연극은 물론 영화와 오페라로도 변신하며 감동을 전했다. 보수주의와 동성애·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혐오가 확산하던 1980년대 미국 사회에 사는 각기 다른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안의 장벽을 풀어낸다. 에이즈에 걸린 전 드래그퀸 프라이어와 그의 동성 연인 루이스, 몰몬교도 부부인 조와 하퍼, 극우 보수주의자인 변호사 로이 등의 세 이야기가 얽혀 진행되는 극이다.
무려 8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이 화제였다. 신유청(40) 연출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관객들이 공연 시간을 납득할 수 있도록 "한 문장 한 문장, 순간 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이란 프레임으로 극에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부분들을 버리고자 애썼다. 극 전반에 깔린 기독교와 유대교, 종교적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되 보편적 메세지를 전하는 데 집중했다는 의미다. 신 연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치, 인종, 학벌, 지역 등에 대한 편견에 한 번에 맞설 수 있는 작품"이라며 "우리 안의 장벽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36년 전 배경의 연극이지만, 전례 없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 아시아인 혐오 등 우리 안의 장벽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 현재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8시간이 우리 안의 동성애·정치·인종·종교 등 다층적 편견과 차별을 무대로 끄집어내고 깨부수는 데 걸린 시간이라면, 오히려 찰나의 순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객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도 뒀다. 우선 물리적으로 공연 시간을 반으로 나눴다. 올해는 1부 격인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를 공연한 후 내년 2월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로 '개혁'을 의미)'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신 연출은 "1부에서 폭발하듯 각 인물의 이야기를 펼쳤다면, 2부는 장벽을 부수는 과정으로 연극 전체의 명확한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장치로 회전 무대를 설치해 보다 다양한 공간을 구현함으로써 지루함을 덜어냈다. 그러면서도 다른 두 공간을 밀도 있게 연결하며 호흡을 이어간 연출이 돋보인다. 각각 병실과 거실에 있는 프라이어와 루이스, 조와 하퍼를 한 무대에 세워 서로의 대사와 동선이 연결되는 듯 엇갈리며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은 특히 관객을 압도한다.
이 작품은 배우 정경호(프라이어 역)의 첫 연극 데뷔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의 대학 2년 선배인 신 연출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고, 어떤 시각으로 보든지 다양성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다"며 캐스팅 이유를 설명했다. 또 "배우의 장르 구분이 비교적 선명한 우리 사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이 작품의 메시지와도 통한다"고 덧붙였다. 공연은 오는 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