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처럼 닮은 두 동네, 엘간 스트리트와 후커힐

입력
2021.12.04 04:30
14면
<5> 송탄과 이태원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는 미국 테네시 주의 주도 내슈빌에 있는 오프리 하우스에서 매주 열린다. 유명 컨트리 가수들이 공연을 벌이고, 입담을 털고, 그 소리들이 녹음되어 전파로 전송된다. 1925년부터 계속되었으니,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가장 유명한 컨트리 가수와 뮤지션들이 출연했다’는 부연만 붙어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을 찾아보면 좀 더 재밌다. 디제이 조지 헤이가 내슈빌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의 이름은 ‘WSM 반 댄스’(Barn Dance)였다. 제목 그대로 시골 헛간에서 춤판을 벌이기 좋은 컨트리 음악과 블루그래스 노래를 주로 틀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하러 시골뜨기 음악을 전시하느냐는 이유였다. 벤조나 만돌린을 뚱땅 거리며 부르는 아메리카 민요 말고, 선진 유럽의 문물인 이탈리아 가곡이나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틀어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조지 헤이의 반 댄스 직전에는 마침 클래식 음악을 주로 트는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었다.

클래식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아메리카 민요를 틀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조지 헤이씨가 옹색한 마음을 가졌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날 이 클래식 방송이 끝난 후 마이크를 잡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청자 여러분 지금까지는 ‘그랜드 오페라’를 들으셨지만, 이제는 저와 함께 ‘정겨운 그랜드 오프리’(Grand Ole Opry)를 들으실 시간입니다.” 캐서린을 귀엽게 캐시라 부르듯 오페라에 지소형 어미를 붙여 오프리로 부른 것이다. 그렇게 ‘오프리’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마치 카바레와 살롱이 한국에 와서 '캬바레'와 '룸살롱'이 되는 치욕을 겪은 것처럼, 유럽의 오페라는 미대륙으로 건너가 아메리카 민요 극장인 오프리가 되었다. 어반딕셔너리에 따르면 오프리는 비하의 의미도 갖는다. ‘힐빌리들의 오페라’, ‘레드넥들이 생각하는 고급 문화’가 그것이다. 오프리는 내슈빌에만 있지 않다. 텍사스에도, 켄터키에도, 미주리에도 잔뜩이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오프리 하우스만큼 거대하진 않지만, 오프리엔 그럴듯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가족을 이끌고 그 동네에서 제일 노래를 잘 뽑는 가수가 부르는 ‘블루 문 오브 켄터키’나 ‘컨트리 로드’를 듣기 위해 모인다. 오프리에 가는 날엔 가슴팍에 장미나 페이즐리 문양이 그려진 웨스턴 셔츠를 입고, 제대로 된 두꺼운 청바지에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가죽 부츠를 신는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면 펠트 천이나 밀짚을 엮은 카우보이 모자는 필수다.


오프리는 미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태원동 우사단로 14길에도 오프리가 있다. ‘펍 ‘그랜드 올 오프리’다. 아주 오래전, 그곳에 처음 간 날을 기억한다. 나는 그날이 핼러윈 데이인 줄 알았다. 카우보이 모자에 부츠를 신은 남녀들이 금요일 저녁의 바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 중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부사관과 그들의 가족이 많았다. 멋들어진 ‘3’자 콧수염이 은빛으로 바랜 백인 아저씨들은 미국의 전통 복장을 갖추고 아메리카 민요를 들으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던 것일까? 언뜻 추석날 한복을 입고 한인 식당을 찾아 LA갈비를 구워 먹으며 참이슬을 마시는 미대륙의 한국인을 상상했다.


그날, 그저 테이블을 비워뒀을 뿐인 펍 중앙의 댄스 플로어에서 남녀 열 명가량이 대열과 안무를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좌석에 앉아 맥주를 들이키던 손님들도 아는 노래가 나오면 모자를 집어 들어 쓰고는 뛰쳐나가 대열에 합류해 춤을 췄다. 복식과 열을 맞춘 남녀의 무도를 보며 중세 유럽의 무도회를 떠올렸다. 그 춤을 ‘라인 댄싱’이라 부른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대체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춤을 알고 있을까? 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라인 댄스라는 과목이라도 있는 것일까?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님들의 너디(nerdy) 로맨틱 시트콤 ‘빅뱅이론’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괴짜 천재 쉘든 리 쿠퍼의 고향은 오프리가 많은 텍사스다. 이 시트콤 전체에서 쉘든은 딱 한 번 춤을 춘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채로, 웨스턴 바에 가서 자신이 춤을 추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쉘든이 추는 춤이 바로 라인 댄스다. “남부에서 자란 사람들은 하도 자주 보고 추니까 따로 배우지 않아도 몸에 라인 댄스가 배어 있나봐.” 그랜드 올 오프리의 한 미국인 아저씨가 가르쳐줬다.

먼 훗날 나는 예상치 못한 도시에서 라인 댄스를 다시 만났다. 기자가 되기 전 나의 첫 직업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고, 담당한 지역이 송탄이었다. 거래처와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미팅을 마치고, 적당히 취해 처음으로 송탄의 구시가지를 돌아본 날이 있었다. 매일 가는 지역이었지만, 해가 진 거리가 적당히 낯설어 마치 여행지라도 온 듯 기분이 좋았다.


송탄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있었다. 철길 남쪽인 지산동엔 옛 시청인 송탄출장소와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고, 북쪽인 신장동엔 오산 공군기지 험프리 캠프의 메인 게이트가 있다, 라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철길을 넘어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철길 위로 난 고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해본 적은 많았지만, 그때까지는 단 한 번도 철길을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영업활동을 벌일 만한 병원이 없다고 들어서였다. 철길을 넘어 오 분쯤 걸었을까? 눈 앞에 좀 어리둥절한 광경이 펼쳐졌다. 오산 공군기지 입구 앞부터 거대하게 펼쳐진 유흥가가 거대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 대부분의 가게에는 ‘한국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하필 금요일 저녁이라 사복을 입은 크루컷의 미군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달걀프라이와 베이컨을 넣어 잔뜩 부풀린 한국식 햄버거부터 일본식 유부 어묵까지 각종 포장마차가 즐비한 쇼핑타운 중앙로의 양 옆으로 핏줄처럼 난 골목마다 위스키와 맥주가 흘렀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 옆으로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은색 수염 백인 아저씨 한 명이 지나갔다. 중앙로의 중간쯤에 서쪽으로 갈래 뻗은 샛길이 있었는데, 그 길 양쪽으로 이름 모를 바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길을 다들 ‘엘간 스트리트’라 불렀다. 아주 오래전 그 길의 끝에 있던 ‘아라곤’이라는 클럽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어떻게 아라곤이 엘간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카우보이 모자는 엘간 스트리트로 들어섰고 나는 뭔가에라도 홀린 듯 그를 따라갔다.


한 백 미터 정도를 따라갔을까, 카우보이 모자가 한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열고 들어간 문틈 사이로 컨트리 가수 앨런 잭슨의 노래 ‘차타후치’(Chattahoochee)가 흘러 나왔고, 라인 댄스를 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간판에는 ‘웨스 플레이스’라 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멋들어진 ‘3’자 콧수염이 은빛으로 바랜 백인 아저씨들은 미국의 전통 복장을 갖추고 아메리카 민요를 듣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자가 된 후에도 나는 송탄을 몇 번인가 다시 찾았고, 꽤 많은 사람들에게 송탄에 대해 물었다. 신장동 유흥가에서 도는 달러가 송탄을 먹여 살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를, 그 시절 송탄에선 개도 입에 달러를 물고 다녔다는 얘기를, 금요일에 주급을 받은 미군 장병들이 부푼 지갑을 들고 신장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돈을 다 써제끼는 바람에 주중 부대에서 점심도 못 먹고 굶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태원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들을 이타인이라 불러 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이태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또 왜군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를 써 이태라 불렀고, 이태들이 사는 동네 일원을 이태원(異胎院)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태원의 한복판에 있지만, 대로 뒤편 후미진 골목이라 눈에 잘 띄지 않고, 진입로 반대편은 오르막길로 거의 막혀 있다시피 한 우사단로 14길, 이 길의 다른 이름은 ‘후커힐’이다. 과거에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던 ‘홀’이라는 형태의 업소가 이 거리에 밀집해 있어 한동안 청소년의 출입이 제한됐다. 후커힐 뒤쪽 우사단로 12길에는 게이힐이 있고 그 위쪽에는 이슬람 거리와 이슬람교 서울중앙서원이 있다.


마지막으로 송탄을 찾은 지는 벌써 오 년쯤 지났다. 그때 웨스 플레이스가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엘간 스트리트 양쪽에는 펍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펍에서는 주로 맥주를 마시고, 포켓볼을 치고, 다트를 던지며 논다. 오래전 이 펍들이 있는 자리 역시 대부분 ‘홀’이었다. 당시 그 거리가 청소년 출입 금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송탄의 아이들은 신장 쇼핑 스트리트 근처에 가면 부모님께 혼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종종 쌍둥이처럼 닮은 이 두 도시를 생각한다. 후커힐을, 엘간 스트리트를 가로질러 라인 댄스를 추러 가는 카우보이 아저씨를 생각한다.

박세회 (소설가·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