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5일 오후, 인천시 남동구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빌라 위층에 사는 남성이 층간소음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아래층 일가 세 명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었다.
당일과 다음 날까지 '층간소음으로 흉기 난동이 벌어졌다'고 보도되던 이 사건은 사흘째부터 이른바 '여경무용론' 논란 위주로 보도되기 시작한다. 사건 당시 출동한 경찰들이 현장을 이탈했는데 그중 한 명이 여성인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한 일간지가 사실과 달리 여경 이탈만을 강조해서 보도했고, 이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케케묵은 여성 혐오에 기반한 '여경무용론'을 내세웠다. 다음 날부터 언론들은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의 여론을 인용해 일제히 여경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하게 된다. 언론이 앞장서서 여경혐오를 확대 재생산한 것이다.
당시 같이 출동한 19년 차 남성 경찰도 현장을 이탈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남성 여성 막론하고 두 경찰 모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처음부터 알려졌더라면 과연 이렇게나 사건 자체보다 여경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을까? 의아하다. 잘못을 한 사람의 성별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왜 칼부림을 한 가해자(남성)의 성별은 강조되지 않을까?
비교해 보기 위해 지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2년 전인 2019년 9월 11일, 충남 당진의 한 식당에서도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났다. 가해자(남성)는 식당 주인(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렀다. 출동한 경찰(남성)은 범인이 식당 밖으로 나올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이 사건은 경찰의 부실 대응과 직무유기라는 면에서 앞선 인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과 유사하다.
그러나 두 사건 보도는 차이가 크다. 당진 사건의 경우 잘못 대응한 경찰의 성별은 중요하게 보도되지 않았다. 반복된 신고에도 매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과 당시 난동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의 부적절한 대응이 비판받은 것으로 보아, 남경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 전반의 문제로 여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사건이라도 잘못 대응한 경찰의 성별에 따라 반응하고 보도하는 차이가 한눈에 보인다.
인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이 왜곡되어 보도된 후 며칠 동안 포털 기사 댓글과 SNS는 여경무용론으로 시끌벅적했다. 23일 전두환 사망 이전까지는.
전두환. 1931년생 남성.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1년 후인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후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남성. 재임 기간 언론통폐합을 하고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며 민주화운동 탄압을 한 남성. 군인이자 정치인이자 학살자인 남성.
그의 사망에 대한 논평이 쏟아졌지만 그의 성별 자체를 문제 삼는 기사는 보지 못했다.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어딘가에 포스팅이 있는데 내가 못 읽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주요 언론사에 자신의 얼굴 사진과 본명을 내걸고 전두환의 악행을 그의 성별과 연관지어 정식으로 쓴 글을 접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전두환의 과오가 전두환이란 개인의 문제이지 남성 일반의 문제는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남성 전체에서 더 범위를 좁혀도 그렇다. 역대 남성 정치인과 군인 집단도 전두환 한 명 때문에 욕먹지 않는다. 한 경찰의 잘못으로 여경 전체가 매도되어 '여경무용론'까지 나오는 며칠 전 현상과 비교해보면 이런 반응은 꽤 신기하다.
여경이라는 점이 아니라 흉기 난동이 벌어지자마자 현장에서 경찰관이 시민을 보호하지 않고 도망친 사실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면, 굳이 성별을 내세워 비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국민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간 사실을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성별 자체에 관련지어 비판받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우선 선조. 1552년생 남성. 1567년에서 1608년까지 조선의 국왕으로 재위했던 남성.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북진해 오자 보름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남성. 국경인 의주에 이르자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갈 것을 엿본 남성 왕. 그러나 선조가 남성인 것은 그의 무책임함의 이유로 비난받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승만. 1875년생 남성. 대한민국 1·2·3대 대통령이었던 남성. 1948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개헌을 거듭하며 장기집권을 꾀하다 4.19혁명으로 사임하고 망명한 남성.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틀 만인 27일 새벽에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남성. 자신은 새벽 3시 30분에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란하면서 그날 밤 9시에 미리 녹음해 놓은 "동포 여러분, 미군이 참전했으며 계속 진격하고 있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담화를 발표한 남성. 이렇게 서울 시민들을 안심시켜놓고 다음 날인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본인만 무사히 부산까지 피란 간 남성 대통령. 그러나 이승만이 남성인 것은 그의 무책임함의 이유로 비난받지 않는다.
국민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이 혼자만 살겠다고 버리고 도망간 것은 앞서 경찰들과 마찬가지이다. 아니, 경찰의 경우 한 국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선조나 이승만과 비교가 안 된다. 선조와 이승만이 과오와 도망 거리의 스케일이 훨씬 크다. 전두환의 경우 국민을 지키기는커녕 학살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래서 남자는 안 돼'라며 남왕이나 남대통령은 무용하다고, 앞으로 뽑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성별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잘못을 한 이가 '어떤' 성별이냐다. 그러기에 지난 11월 2일 경기 양평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에서 여경이 소리를 지르고 도망갔다는 가짜 뉴스를 일부 언론에서 사실관계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인들조차 여경 혐오, 더 나아가 여성 혐오는 자연스러운 일상이기에 굳이 팩트 체크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전두환과 선조, 이승만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미러링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나는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의 패턴을 보자는 말을 하려 한다. 지배 집단이 채찍과 당근을 쓰지 않고 일상에서 편하게 지배하는 방법 중 하나는 피지배 집단에 열등감을 심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 남성이 잘못했을 경우,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조금 더 나아가봤자 그 남성이 속한 직업군이나 조직의 문제로 비판받는다. 남성이라는 성별은 문제의 본질로 거론되지 않는다. 여성의 경우는 다르다. 한 여성의 잘못은 여성 전체의 문제로 여겨져 비난받기 마련이다. '맘충'이 대표적인 예다. 잘 와 닿지 않으면 미국의 흑인 차별을 보면 이해가 쉽다. 생각해보라. 'O둥이들은 원래 게으르다'의 O자리에 어떤 색깔이 들어가는지를. 게으름은 피부색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한 개인의 특성인데 말이다.
한 개인의 잘못이 그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매도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 집단이 그 사회에서 약자 집단이라는 증거다. 그리고 한 개인의 잘못을 그 개인이 속한 약자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몰아가 일상에서 늘 '단체 기합'을 받게 만드는 것, '연좌제'에 걸릴까 봐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한 사회에서 약자 집단, 소수자 집단을 지배하는 일상의 지배 패턴이다.
잘 봐 두자. 이번 인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과 양평 흉기 난동 사건을 보도하는 패턴을. 남초 커뮤니티와 유튜버가 만들어낸 '여경 무용론'을 팩트 체크 없이 베껴 보도해서 확성기 노릇을 한 언론의 무책임함을. 이 과정에 드러난 여경 혐오가 아닌, 유구한 여성 혐오의 패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