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이란 말이 감춘 덫

입력
2021.12.02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여성은 안전하지 못하다. 11월 19일 스토킹 피해로 경찰 신변보호를 받던 한 여성은 옛 연인 김병찬(35)씨에게 살해됐다. 이틀 전인 17일에는 이별을 통보한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여러 차례 흉기로 찔린 뒤 19층 아파트에서 내던져졌다. 9월에는 이혼문제로 남편과 말다툼을 하던 여성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남편이 휘두른 장검에 수차례 찔려 숨졌고, 7월에는 황예진씨가 교제하던 남성에게 맞아 절명했다.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해 살인ㆍ강도ㆍ강간 등 강력범죄 피해를 본 여성은 2만1,006명으로 남성(2,821명)보다 7배나 많다. 이들 중 95%(2만51명)가 강간 등 성범죄 피해자다. 하루 평균 16명의 여성이 강간ㆍ유사강간을, 매일 38명 가까이는 강제추행을 당한다. 여성은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안전하지 못했다. 강간의 경우 가해자의 70% 이상이, 추행은 60% 이상이 친족ㆍ직장 관계자ㆍ지인 등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은 아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여성 상대 범죄를 '데이트폭력'으로 쉽게 부른다. 당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부터 자신의 조카가 2006년 전 여자친구 모녀를 살해한 사건을 데이트폭력으로 언급했다 거센 비난을 받았다. 데이트폭력이라는 말에는 여성 대상 범죄를 호감을 가진 남녀 사이에서 으레 벌어질 수 있는 사랑싸움 정도로 여기는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시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안의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교제살인’이라는 말을 쓰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변화는 더디다. 조두순 사건을 나영이 사건이라 부르는 이들이 여전하다. 교제살인 희생자 황예진씨의 이름과 사진은 공개됐지만 가해자는 지금도 이모씨로 숨겨지고 있다. 성추행 2차 피해를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중사 사건을 피해자의 이름을 따 ‘이예람 중사 사건’이라 부르지 가해자를 지칭해 ‘공군 장 중사 사건’이라고 하지 않는다. 장 중사 사건 때도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사건 때도 피해자 사진이 유출됐고, ‘얼평’ ‘몸평’이 나돌았다. 여성 상대 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인 여성에게 돌리는 지독한 시선이다. 이쯤 되면 남성 중심을 넘어 관음증 사회라는 경고다.

데이트폭력은 강력범죄를 낭만으로 포장해 피해를 키운다. 한국일보가 올해 선고된 ‘교제살인’ 관련 사건 판결문 104건을 분석한 결과 3분의 1 가까이 되는 27건은 강력범죄의 전조가 있었다. 한 여성은 경찰에 3차례나 신고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끝내 어린 두 자녀가 보는 앞에서 흉기에 찔려 살해됐다. 살해되기까지 10개월 동안 폭행이 반복됐다. 하지만 경찰은 가해자에게 ‘경고장’을 발부하는 데 그쳤다. 앞선 폭력을 데이트폭력으로 치부하는 대신 교제살인의 전조로 보고 대응했다면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던 목숨이다.

올해 입사한 견습기자는 잇따른 교제살인 사건을 취재한 후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21세기에 연애를 하면서 상대와의 물리적 힘 차이까지 고려해야 안전할 수 있다니. 동성애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이쯤이면 동성애자가 많은 세상이 더 평온하고 안전한 세상 아닐까.”

이동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