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가정환경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청년이 있었다. 결국 세상을 등지겠다는 마음을 먹고 전국 일주를 떠났다. 어릴 적 소원이나 풀고 가자며 시작한 한여름 도보여행길에서, 그는 낯선 이들과 수없이 만났고 이들에게서 세상의 눈부신 선의를 느꼈다. 81일간 홀로 43개 도시를 걸으면서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는 동안, 오랜 절망으로 딱딱해진 마음은 서서히 풀려갔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걸었다가 또 다른 출발점으로 돌아온 여행. 대학생 최범구(21)씨의 이야기다. 최씨는 최근 자신이 소속된 성균관대 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사연을 올려 큰 공감을 얻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에서 만난 최씨는 이젠 힘든 시절을 떠올릴 때도 담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청년이 됐다.
최씨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가정에선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고, 학교에선 이른바 '왕따'이자 학교폭력 피해자였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던 와중에, 유일한 의지처였던 사촌동생이 2019년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친구 관계마저 단절되자 살고픈 의지가 급격히 꺾였다. "지난해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왜 살까' '사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을 되뇌이기 시작했어요."
위태롭던 삶의 마지막 활력소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올봄, 최씨는 극단적 선택을 결심했다. 7월 12일을 디데이로 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문득 '마지막 소원'으로 전국 일주를 떠올리고 계획을 변경했다. 동해안에서 출발해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걷다가 인천 ○○대교에서 세상을 등지겠다는 것이었다. 대장정의 출발지로 삼은 강원 고성군 초도해수욕장으로 가고자 7월 12일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던 때를, 최씨는 "끝을 향해 달려가기 위한 시작 혹은 카운트다운을 하는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끝을 향해 간다'는 비장한 마음은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어 갔다. 너무나 살갑던 강원 양양군 게스트하우스 사장, 자녀와 같은 대학에 다닌다면서 고기를 사준 부부, 전남 영광군에서 전북 고창군을 향해 걸어가던 그를 태워준 이름 모를 트럭 운전기사, 경북 영덕군에서 길을 묻던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준 할머니들은 저마다 최씨 삶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경주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는데 '가만히 보면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행복하게 살아. 그게 갚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왔어요. 다음 날 걸으면서 그 대사를 되새겨 보니 여행에서 만난 분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떠올랐고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살지"라고 자문할 때마다 떠올랐던 "죽지 못해 산다"는 대답은 석 달 가까운 여정에서 어느덧 "살고 싶어서 사는 거다"로 바뀌어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주변에서 적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씨는 "만약 영광에서 트럭을 안 탔더라면, 어느 날 덜 걸었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을까 싶다"며 "여행을 떠난 덕분에 수많은 인연이 생겼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금도 우울증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던 생각은 완전히 떨쳐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인생을 혼자서라도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미래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겠어요. 무책임한 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을 정말로 해주고 싶어요."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