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계단, 갈수록 태산... 13황제는 어떻게 올랐을까

입력
2021.12.04 10:00
<80> 제노(齊魯)문화 ② 지난·타이안

“제나라와 노나라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태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실컷 보고, 공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세요.”

산둥 땅으로 들어서면 휴대폰 메시지가 뜬다. 미사여구 다 필요 없다. 태산과 공자만으로도 익숙하고 친근하다. 기원전 제나라와 노나라 땅의 환영 인사다. 제나라는 쯔보, 노나라는 취푸가 도읍이었다. 지금 성의 수도는 지난(濟南)이다. 72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샘물이 솟아나기에 천성(泉城)이라 불린다. 한걸음에 천성광장에 있는 표돌천(趵突泉)으로 간다. ‘높이 뛰어오르는 샘’이라니 듣기만 해도 용솟음친다.


표돌천, 한 떨기 꽃잎처럼 시인의 영혼이 서린 샘

청나라 건륭제가 남순 때 샘물로 차를 마시고 감미롭다는 감상을 남겼다.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라 부르며 감동했다. 다경(茶經)을 지은 당나라의 은둔 선비 육우가 천하를 유람하며 차를 마셨다. 소동파가 ‘진면목’이라 했던 여산의 곡렴천을 천하제일이라 했다. 천하제일천이 두 개가 됐다. 아니다. 장강 협곡에서도 본 듯하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주 품질이 뛰어난 샘물이란 뜻이니 꼭 등수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청조기념당(李清照紀念堂)이 있다. 이청조는 북송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으로 송사(宋詞)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다. 금석학 연구가인 조명성과 결혼했다. 남편이 벼슬에 오르자 잠시 떨어져 살게 됐다. 그리운 심경을 담아 서정시를 쓰기 시작했다. 벼슬이 막히고 정쟁에 휩쓸려 실의에 빠진 남편을 도와 금석학 연구에 매진했다. 미술과 문학에도 공통점이 많고 금슬 좋은 부부였다. 금나라가 침공하자 강남으로 유랑했다. 사별 후 재혼했으나 곧 헤어졌다. 말년에는 피폐하고 곤궁한 생활로 고통스러워했다.

이청조의 고향 샘물에 자리 잡은 조각상을 보니 노랫말이 들리는 듯하다. 고난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려낼 수 있는 감성일까? 송사의 곡조 중 하나인 여몽령(如夢令)으로 부른다. 전체 7구인 단조로 1절, 33자이다. 고독한 삶을 그득 담은 수심이 꽃잎 떨어지듯 다가온다. 술을 마시고 깨어난 아침이다. 꽃다운 시절을 회상하건만 어제와 다름없이 무료한 날이다. 한 떨기 떨어지는 꽃잎이 떠오를 뿐이다. 자신의 처지를 읊조린다.


간밤에 가랑비 내리고 세찬 바람 불어도,
푹 자고 일어났건만 여전히 숙취가 남네.
昨夜雨疏風驟, 濃睡不消殘酒.
주렴 걷는 아이에게 물으니,
어제와 다름없이 해당화도 여전하다 하네.
試問捲簾人, 卻道海棠依舊.
아시나요, 아시나요,
푸른 잎 무성하고 붉은 꽃잎 떨어지는 계절인 걸.
知否, 知否, 應是綠肥紅瘦.
이청조



1년 내내 평균 18℃를 유지하는 따뜻한 샘물이다. 솟구치는 샘물을 따라 물고기가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 그저 물결에 몸을 맡긴 듯 솟아오른다. 나무와 정자까지 반영돼 어울리니 약간 비현실이다. 시름은 가라앉고 두둥실 상큼한 마음이 떠오른다.

샘 안으로 살짝 들어간 정자는 관란정(觀瀾亭)이다. 빨갛고 노란 꽃을 감싸고 있다. 양쪽에 2개의 비석이 심어져 있다. 제일천(第一泉)은 청나라 동치제 시대 서예가 왕종림의 작품이다. 표돌천은 명나라 가정제 시대 산둥 순무인 서예가 호찬종의 필체다. 연한 하늘색 색감으로 각인된 비석이 샘물과 산뜻하게 어울린다. 두 사람이 쓴 샘 천(泉)의 필체가 비교된다. 왕종림은 아래로 내려왔다가 다시 뻗은 갈고리가 유난히 치솟고, 후찬종은 살짝 들었다 놓은 듯 찰랑거린다.

표돌천 서쪽에 자리 잡은 관란정은 북송 신종 시대에 처음 세웠다. 샘이나 물이 아닌 물결(瀾)을 봤다. 비문도 후찬종이 썼다고 알려졌는데 얼핏 봐서는 비슷한지 아리송하다. 송나라 황실 후손으로 원나라 관리를 역임한 서예가 조맹부가 지난에 근무했다. 표돌천에 대한 시를 남겼다. ‘낙수(濼水)의 발원’으로 시작한다. 표돌천이 만든 낙수는 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합류한다. 북쪽 방향에 조맹부의 작품을 전시한 낙원당(濼源堂)이 있다. 입구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문구가 예사롭지 않다. 회락비(會濼碑)라 부른다.

십유팔년춘왕정월(十有八年春王正月)은 즉위 18년 정월에 발생했다는 뜻이다. 기원전 694년의 노나라 이야기다. 공회제후어락(公會齊侯於濼)이 중요하다. 좌씨춘추에 나오는 말로 ‘노환공이 제양공을 낙수에서 만났다’는 내용이다. 노환공이 홍(薨)했고 장(葬)을 치렀다는 기록이 짧게 이어진다.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약소국의 노환공은 즉위 3년에 제양공의 누이동생 문강을 부인으로 맞는다. 제나라 땅인 표돌천 부근에서 만난 후 부인이 오빠 제양공과 사통한 사실을 알고 크게 꾸짖었다. 들통 난 제양공이 귀국하는 노환공을 처참하게 살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약하면 서럽다. 지저분한 역사를 맑은 샘물에 다 씻고 싶다.

대명호, 누각과 정원이 어우러진 호수

표돌천을 빠져나온 물은 두 갈래로 갈라지다가 수많은 샘과 합쳐 북쪽에 있는 대명호(大明湖)를 이룬다. 호수는 이름만큼이나 넓어 동서로 1,500m, 남북으로 500m에 이른다. 워낙 커서 문도 많다. 남쪽에만 17개가 있을 정도다. 서문으로 들어가 한 바퀴 산보를 한다. 누각과 정자, 사당과 정원이 호수와 어울린다. 작은 섬도 있고 유람선도 떠다닌다. 고급 식당도 꽤 많다. 산들바람 불고 한가롭게 호반을 걸으니 기분이 좋다. 중국엔 호수가 넓은 도시가 생각보다 많다. 물과 도시는 뗄 수 없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호반과 거의 붙어서 철공사(鐵公司)가 있다. 명나라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정난지변(靖難之變)을 일으켰다. 조카를 죽이고 황제가 됐다.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항거한 신하도 많았다. 산둥 포정사를 역임한 병부상서 철현은 대명호 남쪽에 군영을 두고 끝까지 항쟁했다. 포로가 됐으나 투항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청나라 시대에 사당을 세웠다. 철현은 원나라 시대 회회인(回回人)의 후예다. 지금의 후이족이다.

사당에 불산도영(佛山倒影) 비석이 있다. 청나라 말기에 유악이 소설 노잔유기(老殘遊記)를 써서 무능한 관료를 통렬히 비판했다. 산둥 일대가 배경이다. '철공사에서 보니 천불산(千佛山)이 대명호에 비친다'는 대목이 나온다. 멀리 떨어진 천불산의 그림자가 비치는지 논쟁이 많다. 교육 이론가이자 행정가인 후스가 1922년 10월 대명호를 찾았다. 산의 자태를 찾았던 듯싶다. 3년 후 노잔유기에 대한 ‘서(序)’를 썼다. 작가의 오기라며 실소를 참기 어렵다고 했다. 후스는 소설을 현실로 착각했다. 소설가의 마음으로 이해하면 천불산이 보이지 않을까?


표돌천, 대명호와 함께 지난의 3대 명승지가 천불산이다. 대명호에서 남쪽으로 4㎞ 떨어져 있다. 산문으로 들어서면 영관전을 시작으로 재신전, 삼청관 등 도교 전각이 수두룩하다. 올라가면 점점 불교 사원으로 변한다. 10m 길이의 와불에 빨간 천을 두르니 따뜻해 보인다. 가장 위에는 수나라 때 처음 세운 천불사가 있고 문창각 패방도 있다. 유불선이 모두 자리를 잡고 있다.

산 중턱에서 시내를 바라보니 금빛 번쩍이는 미륵불이 보인다. 높이가 31m에 이르는 대불이다. 중생의 고통을 다 헤아리는 듯 푸짐한 자태로 앉아 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표돌천은 물론 대명호도 보이지 않는다. 천불산이 부리나케 위치를 옮긴면 모를까 소설이 현실이 되긴 힘들어 보인다. 천불산은 해발 285m로 태산의 산줄기와 잇닿아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관광버스와 케이블카로

지난에서 남쪽으로 1시간이면 타이안(泰安)에 도착한다. 태산을 올라 정상에서 묵을 예정으로 짐을 맡긴다. 터미널, 기차역, 관광지 입구마다 짐을 맡아주는 장소가 많아 배낭여행이 아주 편하다.

택시 호객이 극성이다. 거들떠보지 않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20분이면 태산 입구 천외촌(天外村)에 도착한다. 천천히 걸어 등산로 출발 지점인 일천문(一天門)으로 간다. 진시황은 통일 후 유학자를 위무하기 위해 태산에 올랐다. 청나라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명의 황제가 다녀갔다. 당나라 현종이 하사한 천하기관(天下奇觀) 비석과 만난다. 태산은 비문 진열장이다. 온통 붉은 글씨로 뒤덮었다.

일천문에서 중천문(中天門) 사이가 약 4㎞, 중천문과 남천문(南天門) 사이는 약 3㎞다. 보통 걸음으로 3시간씩 걸린다. 남천문 오르는 길이 더 가파른 터라 시간이 비슷하다. 천외촌과 중천문 사이는 관광버스가 왕복한다. 중천문과 남천문 사이는 케이블카가 있어 등산을 하지 않아도 정상에 쉽게 오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 양사언이 ‘하늘 아래 뫼’라 했다. 그의 시처럼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심정으로 출발한다.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 패방이 바로 이어진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인 1560년에 세웠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는 ‘맹자’ 기록에 근거했다. 우화에 가까운 기록인 ‘한시외전(韓詩外傳)’이나 ‘논형(論衡)’에도 공자와 태산이 등장한다. 공자는 제자 안회와 함께 태산에 올라 600㎞ 떨어진 소주의 성문 밖 백마를 봤다. 왼쪽에 명나라 가정제 시대 서예가 이복초가 쓴 제일산(第一山)이 보인다. 무당산에 새긴 북송 화가 미불의 제일산이 떠오른다. 천하제일 산도 많지만 서예 작품 '제일산'도 많다.


만선루(萬仙樓)에서 입장권을 검사한다. 1㎞를 오르면 삼관묘(三官廟) 앞이다. 향을 짊어진 짐꾼이 보인다. 경석욕(經石峪) 부근에서 쉬어 간다. 컵라면 하나 끓여먹고 오이 두 개와 물 한 병을 샀다. 기념품 가게와 길거리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한눈을 팔지 않고 정면으로 집중하는데 호흡이 거칠어진다. 땀도 비 오듯 떨어진다. 고개를 살짝 들면 바위마다 새겨진 글씨를 보느라 혼란스럽다. 눈길을 확 사로잡는 글씨가 보였다.

폭포를 바라본다는 뜻인 첨포(瞻布)다. 좀 이상하다. 옆 바위에 글자를 두 번 썼나 생각했다. 하나는 삼 수(氵) 변에 포를 썼다. 자전을 뒤져도 찾을 수 없다. 1989년인 광서신사(光绪辛巳), 음력 2월이라는 중춘(仲春)에 광저우에서 온 유소화가 썼다. 필체로 보면 한 사람의 글씨다. 바로 앞에 폭포가 있다. 폭포를 봤건만 물이 없다는 소회였을까? 폭포의 포는 '뿌리다'는 뜻도 있다. 태산은 그다지 물이 없는 산이다. 하늘에서 물이라도 뿌리길 바라는 마음에 한번 더 쓰지 않았을까?



하산하는 사람이 꽤 많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다.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잘도 내려온다. 오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짐꾼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른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다. 더 이상은 힘들다고 저절로 하소연을 토할 시점이 되니 중천문이다. 참 힘든 등산이다. 배출한 만큼이나 온몸에 땀이 뱄지만 그만큼 기분도 상쾌하다. 이제 절반 올랐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케이블카를 탄다. 고공으로 비행하며 하늘 아래 뫼 가까이 금방 오른다. 10분 만에 가볍게 남천문에 도착한다.


태산 정상은 30분가량 더 올라가야 하는데 그다지 힘든 길이 아니다. 천가(天街)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도교 사당인 벽하사(碧霞祠)가 나타난다. 서신문(西神門)과 동신문(東神門)을 차례로 통과하면 바위를 온통 붉게 도배한 대관봉(大觀峰)에 이른다. 황제의 칙령을 받은 동악묘가 있었다. 20세기 민국 시대에 훼손돼 사라지고 글자만이 남았다.

오른쪽 벽면에 새긴 기태산명(紀泰山銘)은 725년에 다녀간 당나라 현종의 어서(御書)다. 태산에 대한 예찬으로 제목과 낙관까지 모두 1,008자에 이른다. 왼쪽에 있는 운봉(雲峯)은 1684년 청나라 강희제가 썼다. 바로 아래에 야숙대정작(夜宿岱頂作)이 새겨져 있다. 태산의 별칭이 대산(岱山)이다. 1748년 건륭제가 태산에 올라 하룻밤 묵은 감상을 노래한 시다. 절벽의 보검이라는 벽립만인(壁立萬仞),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천지동유(天地同攸)라는 감탄도 있다.

가운데 푸른색의 청벽단애(青碧丹崖)는 조명성의 필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석문을 연구하기 위해 대관봉에 올라 당나라 서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에 몸을 둔다는 뜻인 치신소한(置身霄漢)은 청나라 강희제 시대 이수덕의 솜씨다. 중앙 꼭대기에 전서로 쓴 오악지종(五嶽之宗)은 태산의 자부심이다. 바로 옆 여국동안(與國同安)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드러냈다. 산 전체에 석각을 새겼지만 대관봉 비문이야말로 가장 화려한 전시장이다.

정상 표지가 옥황정(玉皇頂) 마당에 있다. 도교가 명산을 선점한 까닭이다. 태산극정(泰山極頂)과 함께 1,545m라는 표시가 또렷하다. 2007년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기록은 1532.7m다. 소전(小篆)으로 써서 암호 같이 보이는 태 자도 있다. 소원을 비는 열쇠가 마당을 빙 둘렀다. 천가 근처에 몰려있는 민박에서 하룻밤 숙식을 한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일관봉(日觀峯) 근처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천천히, 멀리서, 살살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려고 줄잡아 1만 명이 모였다. 함께 해를 맞이하니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분위기다. 쉬운 인연이 아니다.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환호성을 지르는 소통이다. 서로 따스한 눈인사를 날리고 또 잡는다. 아침 해의 기운을 받아 몸 상태도 좋다. 충분히 계단을 타고 내려갈 수 있겠다.



케이블카 위에서 내려다 본 길로 하산한다. 남천문 출발, 중천문 도착이다. 이처럼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도전을 했다면 아마 탈진하고도 남았겠다. 계단이 정말 많다. 6,660개라고도 하고 6,290개라고도 한다. 숫자일 뿐이다. 그냥 고행의 계단이다.

용문(龍門)을 지나니 '고개 돌려 남천문 십팔반 전경을 보라(回頭看南天門十八盤全景)'는 문구가 나타난다. 줄곧 오르기만 하는 1,600여 개의 남천문 계단을 십팔반이라 부른다. 이 길을 올라야 진정으로 등산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다는 선언이다. 공감이다. 멀리서 보면 인생을 훨씬 더 심오하게 배운다는 말인가.

중간을 반으로 나눠 등산과 하산을 했으니 태산의 정기를 다 밟은 셈이다. 황제처럼 석각을 남길 수는 없었다. 땀만큼은 무수히 남겼으니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