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한밤중'이라는 시간은 호기심의 원천이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여행이나 캠핑을 갈 때, 친구네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할 때 어린이들은 낯선 곳에서 잠을 못 이루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불을 끄고 누워 있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어도 된다는 사실에 가슴 설렌다. 어둠으로 가득한 의문의 시간을 새로운 풍경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일과 같다.
이 책의 주인공 해랑이는 할머니와 함께 밤바다로 나간다. 보름달이 떠 있고 헤드랜턴 불빛도 앞을 비춰 주지만 어두컴컴한 해변에서 오직 할머니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무섭기도 할 것이다. 해랑이가 이렇게 일생일대의 모험에 나선 이유는 '바다 곳간'에서 엄마 생일 선물을 찾기 위해서다.
오늘 밤은 물 빠진 갯벌에서 불빛을 보고 모여드는 바다 생물을 잡는 '해루질'을 하기 딱 좋은 사리 때다. 해랑이도 작은 물옷을 입고 나서기는 했는데, 정말로 할머니 말처럼 엄마에게 줄 선물이 바다에 있을지 걱정이다. 게다가 소박하게 소쿠리에 호미만 들고 나간 할머니에 비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크고 무시무시한 장비들과 삽을 가지고 와서 갯벌을 푹푹 파헤치고 있다. 할머니는 "적당히들 잡아유"라고 한마디 하는데, 사실 이 말에는 매우 복잡한 심경이 깃들어 있다.
내가 사는 제주에서도 해루질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바닷가 마을 어촌계에서는 "무차별 해루질로 마을어장이 황폐화하고 있다"며 해루질을 막았고, 결국 제주도에서는 '비어업인의 포획·채취 제한 및 조건'을 전국 최초로 고시했다. 해루질을 즐기던 사람들은 "바다가 어촌계 거냐"고 불만을 터뜨렸지만, 사실 바다는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정화되고 자원이 퐁퐁 솟아나는 공간이 아니다. 일정한 '경계'를 지닌 공동체가 오염과 남획을 막기 위한 도덕과 문화, 규칙 같은 것을 갖추고 관리해 왔기 때문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 체하거나 평가절하하면 안 된다. 또 바다 생물이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바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물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다가 우리에게 풍요를 선사하는 만큼 우리는 그곳이 계속 풍요로울 수 있도록 돌볼 의무가 있다.
해랑이 할머니는 "딱 필요한 만큼만 잡자. 새끼 고기는 그냥 놔둬. 그래야 바다 곳간이 비질 않는다"고 말하며 맛 좋은 조개를 골라 소쿠리를 조금씩 채운다. 하지만 해랑이의 눈에 띈 것은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조개 껍데기. 고둥이 조갯살을 빨아먹은 자국이다.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해랑이 옆에서 할머니는 소라 껍데기에 들어가 있는 알 밴 주꾸미를 발견하고 신이 났는데, 해랑이는 "안 돼요! 알도 놔줘야지요"라면서 곧바로 배움을 실천(!)한다.
주꾸미를 풀어 주며 들여다본 바닷속은 경이로운 풍경으로 가득하다. 낙지가 촉수를 뻗어 새우를 사냥하고, 새끼 갈치가 몸을 세우고 헤엄친다. 해삼과 불가사리는 바위에 몸을 딱 붙이고 있고, 고둥과 조개도 보일 듯 말 듯 제자리에 있다. 오랜 시간 바다를 관찰해 온 작가의 눈으로 보는 생생한 풍경 앞에서, 이렇게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를 우리는 매대에 놓여 있는 '해산물'로만 보고 있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바닷속 구경에 정신이 팔린 해랑이 주위로 짙은 해무가 몰려든다. 할머니는 간신히 찾았지만,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간담?
그때 저 멀리서 불빛이 흔들흔들 다가온다. 사실 해랑이와 할머니가 바다로 출발하던 장면을 보면, 집집마다 혼자 계시던 동네 분들이 안 주무시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엄청난 해무가 끼자 두 사람이 걱정돼 너나 할 것 없이 경운기를 타고 나온 것이다.
해랑이는 이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살았을까. 새벽 두 시의 해랑이네 툇마루에는 바다 곳간의 선물뿐 아니라 동네 분들이 두고 가신 값을 따질 수 없는 선물까지 가득하다. 딸을 여기 맡기고 먼 곳에서 일하고 있는 해랑이 엄마 또한 소리 없는 응원 속에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랑이는 아마 오늘 밤의 모험을 통해 바다와 갯벌, 그리고 마을과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 책 마지막 펼침면에는 할머니, 엄마, 해랑이로 이어지는 세 명의 여성이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달, 지구의 상징인 푸른 바다와 나란히 그려져 있다. 사람과 사람이, 자연과 사람이 서로 보살피고 돌보는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삶은 이렇게 힘차게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림책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