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1시쯤 찾은 충북 청주시 오창의 '국가기상 슈퍼컴퓨터센터'. 3층에 올라가자 가장 최근 도입된 슈퍼컴퓨터 4, 5호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컴퓨터야 날씬해지다 못해 미려한 디자인을 뽐내기 바쁘지만, 여기 컴퓨터에는 '슈퍼'라는 이름이 붙어서일까. 초기 컴퓨터 시대 자료사진에서나 보던 수십 수백 개의 번쩍대는 메모리들이 가득 들어찬 캐비닛들이 센터를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날씨에 관여하는 요소들은 무궁무진하다. 슈퍼컴퓨터는 이 모든 요소들을 대입, 재빨리 계산해내는 역할을 맡는다. 하루치 기상 예보를 할 때 슈퍼컴퓨터가 소화해내는 계산량은 무려 4,450조 번에 이르는 방정식 풀이다. 12일 정도의 기간을 예보할 때는 방정식 풀이 횟수가 무려 5경 번에 달한다. 자료입력, 계산, 분석으로 예보를 만드는 데 90분 정도 소요된다.
엄청난 성능을 지닌 슈퍼컴퓨터지만, 의외로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매해 조금은 더 나은 컴퓨터가 개발돼서다. 그래서 '슈퍼컴퓨터'라는 명칭에는 똑떨어지는 정의가 없다. 어느 정도 속도로 어느 정도 계산량을 소화해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봤자 몇 년 뒤면 무용지물이어서다.
그 때문에 계산능력을 따져 1위부터 500위까지만 '슈퍼컴퓨터'라고 부른다. 한때 1위였던 슈퍼컴퓨터라 해도 다른 컴퓨터가 개발되면 점점 후순위로 밀리다가 500위권 밖으로 사라지는 방식이다. 보통 이 주기는 5년 정도된다. 제아무리 똑똑한 컴퓨터라도 5년 뒤엔 세계 500위 아래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기상청의 슈퍼컴퓨터 교체 주기도 5년 정도다.
우리나라 기상청에 슈퍼컴퓨터가 도입된 건 1999년이었다. 그 전해인 1998년 지리산 폭우 때 강수량 예보에 실패하면서 9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예보의 정확도를 높이자며 그 다음 해 슈퍼컴퓨터 1호기가 도입된 것. 이후 정기적 교체를 통해 현재는 4호기 2대와 5호기 2대, 모두 4대가 가동되고 있다.
이 가운데 올해 새로 들어온 5호기는 2019년 계약 체결 때부터 논란이 됐다. 중국계 다국적 기업인 레노버 제품이라는 이유에서다. 기상청은 손사래를 친다. 계약사만 레노버일 뿐, 핵심이랄 수 있는 CPU는 미국 인텔사 제품이고, 메모리와 전기설비는 국산이다. 또 중국은 이미 전 세계 슈퍼컴퓨터 가운데 36%를 보유하고 있다. 성능 면에서 떨어질 게 없다는 얘기다.
실제 5호기 2대는 전 세계 슈퍼컴퓨터 중 순위를 따지자면 27, 28위에 해당한다는 평가다. 4호기 대비 계산속도는 8.8배, 수행효율은 9.6배에 달한다. 하루 날씨 예보를 하는 데 4호기는 1시간이 채 안 되는 3,200초가 걸리지만 5호기는 30분이 채 안 되는 1,284초로, 계산 시간을 절반 이상으로 줄였다. 전력 소모량 등을 따지면 슈퍼 컴퓨터 운영에 들이는 자원도 절반 수준이다.
슈퍼컴퓨터가 날씨 예보에 큰 도움을 주지만,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건 아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일기예보의 정확도는 결국 예보 모델의 성능, 예보관의 능력, 관측자료 등이 좌우한다. 기상청이 '한국형 예보모델'이라 부르는 'KIM'을 잘 만들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5년 뒤 퇴임하는 슈퍼컴퓨터들은 어떻게 될까. 500위권에서 밀려난다 해도 그 엄청난 계산 능력을 그냥 내다버리는 건 아까운 일 아닐까. 그래서 다른 분야에서 다시 쓰인다.
기상청은 5호기가 KIM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면 4호기를 퇴출시킬 계획이다. 현재 4호기 2대의 슈퍼컴퓨터 순위를 따져보면 세계 251, 252위인데, 내년 상반기쯤이면 500위 밖으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정확한 사용처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4호기 등장으로 물러난 3호기는 고등과학원(KIAS),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에 보내져 유전자 분석 등에 쓰이고 있다. 4호기도 과학관에 보내져 쓰여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