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절정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얼마 전까지 여행객으로 붐비던 전국의 단풍과 억새 명소는 다시 한적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되찾고 있다. 그 적적함마저 늦가을 서정으로 즐길 수 있다면 지금이 적기다. 억새꽃 떨어진 자리에 쓸쓸한 바람이 스치는 합천 황매산을 다녀왔다.
합천에는 기차역이 없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하루 두 번 운행하는 프리미엄 시외버스(4시간 소요 · 4만2,100원)를 타거나 대구서부, 부산사상, 마산, 진주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제는 합천터미널에 도착해서다. 드물게 다니는 농어촌버스 여행은 현실적 불가능하다. 군 단위 작은 지역이라 렌터카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올해 7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합천관광택시다. 군에서 일부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시간당 1만 원 꼴, 3·5·8시간 이용에 3·5·8만 원이다. 3~4명이 함께 이용하면 부담은 더욱 줄어든다. 베테랑 기사가 지역 명소와 맛집까지 안내해 주니 VIP 여행서비스나 마찬가지다.
예약 및 문의는 합천관광택시 홈페이지(hctaxitour.modoo.at) 또는 합천군관광협의회(055-933-9235). 3·5·8 이벤트는 예산 소진 시까지 운영하며 관광지 입장료와 식사비는 별도다.
류재곤 기사의 5시간 코스 합천관광택시에 탑승했다. 첫 목적지는 읍내 북쪽, 황강변의 신소양체육공원이다. 늦가을 핑크뮬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핑크뮬리 동산을 나선형 계단으로 조성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했다. 색이 많이 바랬지만 인증사진 찍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점심은 기사님이 추천한 ‘3·3국밥' 식당의 모듬국밥으로 정했다. 돼지고기를 2~3일간 정성 들여 고아낸 합천의 대표 음식이라고 한다. 양이 풍부한데다 담백한 국물이 인상적이다. 밥 한 공기를 통째로 넣어서 말았다. 반찬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맛이 깔끔하다.
다음 코스는 읍내 황강변의 함벽루. 고려 충숙왕 8년(1321) 합주 지주사 김영돈이 대야성 기슭에 세운 이층 목조 기와집이다. 암벽에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누각에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의 글이 걸려 있다. 오래 전부터 시인과 묵객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는 증거다. 누각에 앉아 황강을 바라보면 옛사람의 멋과 풍류가 아련히 되살아나는 듯하다.
다음은 정양늪생태공원으로 향한다. 자연과 호흡하며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공원으로 3.2㎞ 탐방로가 개설돼 있다. 식후 가벼운 산책 코스로 그만이다. 함벽루와 가깝지만 느낌은 완전히 다른 힐링 공간이다.
합천읍에서 용주면을 지나면 합천호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다. 산자락과 마을이 수면에 그림처럼 비친다. 호반 도로를 천천히 달린다. 기사님에게 사진찍기 좋은 곳을 물었더니 댐 건너편 호수 조망점에 차를 세웠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와 우람한 산줄기, 그 경계에 자리잡은 마을까지 한데 어우러져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다. 일상에 지친 마음에 호수만큼 넓은 여유를 품는다.
합천 여행의 정점은 누가 뭐래도 황매산 군립공원이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암괴석과 그 사이에 휘어져 나온 소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봄에 분홍빛 철쭉으로 뒤덮이는 황매산의 이맘때 주인공은 단연 억새다. 완만한 산길을 따라 드넓은 억새 평원이 펼쳐진다. 눈부신 억새꽃(열매)을 보기에는 늦었지만, 대궁은 그대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듯 살랑거리는 억새의 물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하늘계단을 올라 해발 1,000m에 위치한 산불감시초소에서 내려다본다. 전망이 탁 트인 억새 평원과 그 뒤로 펼쳐지는 산 능선이 딴 세상 풍경처럼 낯설고도 멋스럽다. 여행객 뿐만 아니라 사계절 사진작가들이 몰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지막 코스는 2004년에 건립된 합천영상테마파크다. 1920년대와 1980년대에 특화된 시대극 오픈 세트장이자 레트로 감성 핫플레이스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 ‘에덴의 동쪽’ ‘경성스캔들’ ‘미스터선샤인’,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인천상륙작전’ ‘택시운전사’ ‘강철비’ 등을 촬영한 곳이다. 광고와 뮤직비디오까지 치면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영상 작품만 190편이 넘는다.
일제강점기 종로 거리,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였던 경무대, 굴다리 아래 사람 냄새 나는 1980년대 포장마차 등을 거닐면 타임머신을 타고 영상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모노레일을 타면 청와대 세트장로 연결된다. 실제 청와대를 68% 크기로 재현했다. 청와대는 평소 일반의 출입이 불가능한 비밀의 장소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다.
합천에서 숙박을 할 예정이면 청와대 세트장 옆에 위치한 한옥 '우비정'을 추천한다. 카페도 함께 운영한다. 숙박 확인증으로 청와대 세트장, 합천영상테마파크, 대장경테마파크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합천국보테마파크(루지)와 합천패러글라이딩파크 이용료도 할인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