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오피스텔에서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범행 8일 전 접근금지 조치를 어기고 피해자와 통화를 시도했다가 신고당했지만, 경찰은 "잘못 걸었다"는 피의자 해명만 믿고 즉각 조사에 나서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조치 위반 행위엔 형사처벌도 따를 수 있었던 터라, 경찰이 미온적 대처로 더 큰 화를 불렀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서울경찰청은 24일 특정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열고 이 사건 피의자가 35세 김병찬이라고 공개했다.
이날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 A씨는 이달 11일 김씨에게 전화가 오자 이를 받지 않고 경찰에 알렸다. 김씨는 이틀 전인 9일부터 스토킹처벌법에 따른 잠정조치(100m 이내 접근금지, 통신 금지, 서면 경고)가 적용돼 이를 어기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도 내부 매뉴얼을 통해 잠정조치 위반자는 입건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담당 경찰관은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고 내용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김씨에게 "휴대폰을 실수로 잘못 눌렀다"는 말을 들은 뒤 "A씨에게 전화를 걸지 말라"고 경고만 한 것이다. 김씨가 실제로는 A씨와 통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달 20일 피해자 조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A씨와 김씨 모두에게 향후 수사 과정에서 잠정조치 위반 사건도 처리하겠다고 설명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A씨는 조사 전날인 19일 김씨의 급습을 받고 흉기에 찔려 숨졌다.
경찰은 이번 범행 과정에서 김씨를 제지할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이달 7일 "전 남자친구가 스토킹과 협박을 한다"는 A씨의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해 김씨와 마주했지만 연행하지 않았다. 경찰은 김씨가 임의동행을 거부했고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틀 뒤인 9일엔 "김씨가 직장으로 찾아왔다"는 A씨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김씨는 사라진 후였다. 이날 법원이 김씨에 대한 잠정조치를 결정하긴 했지만, 출동 이후 내려진 결정이라 체포에 나서진 못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A씨는 이달 7일 신고와 함께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경찰의 보호 조치가 허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A씨는 7일부터 피해자 임시숙소, 9일부터는 지인 집에서 피신했다가 15일 집으로 돌아왔지만, 경찰은 A씨가 숨지기 전 1주일 동안은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범행 전날 A씨와 통화할 때도 안전 여부만 확인하고 소재지는 묻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관련기사 ☞ [단독] 5번 신고했는데… 경찰은 일주일간 피해자 소재도 몰랐다). 피습 당일에도 A씨에게 신변보호용으로 지급한 스마트워치의 위치값을 잘못 해석해 현장에 뒤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사건을 수사 중인 중부경찰서는 김씨가 계획적으로 범행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범행 하루 전 서울에 와서 모자와 흉기를 구입하고 종로구 숙박업소에 투숙했다. 이어 19일 오전 11시 6분 피해자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찾아가 주차장에 A씨 차량이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집 앞 복도에서 피해자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범행했다.
김씨는 우발적 범행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겁을 주려는 의도만 있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A씨가 스마트워치를 통해 경찰에 신고했을 때 들려온 경찰 목소리에 흥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 동기 및 경위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김씨와 A씨의 휴대폰 등에 대한 디지털포렌식 작업이 일부 이뤄져 내용 분석을 앞두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