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8,000억 원을 미납한 인도네시아와 끝까지 손을 잡고 갈지 아니면 결별할지 기로에 섰던 '한국형 전투기(KF-21)' 공동개발사업이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지난 11일 인도네시아가 KF-21 총 개발비의 20%를 오는 2026년까지 부담하는 기존 계약의 틀을 유지하되, 분담금의 30%는 현물로 내는 절충안에 양국이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자국 경제 사정을 들어 2017년부터 분담금을 연체해온 인도네시아가 2018년 9월 재협상을 요구한 이후 3년 이상 이어진 추가협상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겁니다.
노심초사하던 군 당국은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간 6차례 진행된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공동 개발을 지속하는 대가로 인도네시아에 차관 50억 달러(5조9,000억 원)를 제공한다거나 식량기지화 사업을 지원한다는 설까지 나왔으니까요. 분담금을 대폭 깎아주거나 기간을 2, 3년 늘려줄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죠. 실제 인도네시아가 이런 요구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우려 속에 기존에 약속한 금액을, 애초 예정된 기간에(2016~2026년) 받기로 했으니 한시름 놓게 된 겁니다.
다만 안심할 단계는 아닙니다. 분담금의 30%를 현물로 받기로 했는데, 그 물품이 무엇인지 결론이 나지 않은 탓입니다. 애초 2026년까지 소요되는 총 개발비는 8조8,000억 원. 그러나 2017년 KF-21이 방산물자로 지정되면서 부가가치세가 감면돼 8조1,000억 원으로 줄었는데요. 이에 인도네시아의 분담금도 1조7,000억 원에서 1조 6,000억 원으로 감소하면서 이 중 30%인 4,800억 원에 해당하는 현물을 대신 받게 됐습니다. 5,000억 원에 육박하는 현물을 무엇으로 받을지는 내년 초 사업주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인도네시아 국방부의 '비용분담 수정계약'을 통해 확정됩니다. 무엇을 받아야 '실패하지 않은 협상'이 될지, 손익분기점이 궁금해집니다.
방위사업청과 KAI는 협상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욕 먹지 않을' 마땅한 현물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라고 합니다. 우선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간 무기 거래에서 상대국으로부터 일부 금액을 현물로 대신 받은 적도, 반대로 우리나라가 현물로 대납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때 노르웨이에 K-9 자주포를 수출한 한화디펜스가 대금 일부를 '노르웨이산 고등어'로 받았다는 설이 돌았는데요. 사실이라면 농수산물을 받아온 선례를 참고해 '인도네시아산 바나나'를 후보군에 올려 놓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루머로 확인됐습니다. 해당 업체는 "그런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퍼졌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노르웨이 측에서 그런 요구를 해 온 적도 없고, 모두 현금으로 계약을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1991년 노태우 정부에서 소련(현 러시아)에 수교 대가로 빌려준 14억7,000만 달러(1조7,400억 원)의 차관을 T-80U 전차와 BMP-3 장갑차 등의 무기로 돌려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불곰사업'인데요. 소련의 붕괴로 원금조차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고육지책으로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방산물자를 받은 겁니다. 이 경우는 빌려준 돈을 무기로 상환 받은 사례입니다. 이번처럼 무기를 팔고 현물을 대신 받은 케이스는 아니라서 동일선상의 비교가 어렵습니다.
일각에선 무기 거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충교역’을 참고하면 된다는 의견도 나오는데요. 해외에서 무기를 사올 때 반대급부로 기술 이전, 부품제작, 군수 지원을 받아내는 절충교역은 현금 지불을 전제로 추가로 받아내는 '특약' 성격이라 이 역시 선례가 되진 못합니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2014년 미국 록히드마틴사로부터 F-35A 전투기 40대를 7조4,000억 원에 들여오면서 군 통신위성(아나시스 2호)을 덤으로 받는 ‘절충교역’을 진행했는데요. 어마어마한 전투기 값을 록히드마틴사에 전액 현금으로 내는 대가로 일종의 사은품(?)을 받은 것이기에 현물 대납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실제 무기 거래에서 현물로 대납하는 물물교환은 성사되기 쉽지 않습니다. 현물을 받는 국가 입장에서 손실을 따지는 것이 복잡한 탓인데요. 국내에 반드시 필요한 물자여야 하고요. 막대한 물량을 들여왔을 때 국내 산업에 피해를 끼치면 안 되기에 자국에서 대량 생산되는 상품은 불가합니다. 시장이 대혼란에 빠질 우려도 있고요. 정치·외교 상황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현지 노동자를 착취한 공산품이나 농산품을 받아올 경우 역풍을 각오해야 합니다.
2000년대 초 태국 사례를 보면 물물교환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군사 위협을 피부로 느꼈던 태국은 신형 전투기를 해외에서 구매해 전력을 보강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문제는 동남아를 휩쓴 외환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아 전투기를 살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요. 당시 탁신 친나왓 총리는 전투기 대금 대신에 국내에 넘치는 냉동 닭을 받아줄 전투기 보유국들을 찾아 나섭니다. 닭고기를 안 먹는 나라는 거의 없으니까요. 태국은 손꼽히는 '닭고기 수출국'입니다. 수호이(Su-30) 전투기를 보유한 러시아, 라팔 전투기 생산국 프랑스, 그리펜 전투기를 만드는 스웨덴 등이 접촉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닭고기를 수입하고 있는 데다 당시 조류독감이 유행하는 동남아에서 닭고기를 받아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죠. 양계업이 발달한 프랑스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닭을 놔두고 굳이 태국산을 들여올 이유가 없었고요.
스웨덴과는 전투기 6대와 태국산 닭 8,000만 마리를 교환하자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갔는데요. 실제 이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됐는지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탁신 총리가 2006년 쿠데타로 축출되면서 정치적 상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무엇을 받아와야 '본전은 찾았다'는 평가를 받을까요. 방사청은 "천연자원부터 군수품, 일반 물자까지 다 생각하고 있는데 현재 정해진 것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내년 초 돌입할 인도네시아와의 협상에서 서로의 패를 까봐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봄직한 것은 천연자원입니다. 국토 면적이 우리의 9배가 넘는 인도네시아는 석유, 천연가스(LNG), 유연탄이 풍부한 자원부국입니다. 더구나 이들 자원 대부분 우리나라가 전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품목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일례로 한국가스공사는 현재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카타르 등 7개국에서 LNG를 수입하는데요, 이번 기회에 LNG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면 적어도 밑지는 장사는 되지 않을 겁니다.
일각에선 1만 개가 넘는 섬을 가진 인도네시아로부터 섬 하나를 받아오자는 아이디어도 나옵니다. 안 그래도 좁은 국토에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군사훈련을 하기 어려운데 마음껏 훈련할 수 있는 섬을 보유하자는 겁니다. 실제 "동남아에 섬이라도 하나 빌려서 제대로 훈련해보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지휘관들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섬의 적정 가격을 책정하는 것부터가 난제라 현실성에는 의문이 듭니다.
최근엔 인도네시아 특산물인 '팜유'가 유력후보로 부상했습니다. 방사청 고위 당국자가 15일 언론 브리핑에서 "확정된 건 없지만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가 팜유를 많이 생산하는데 세계적으로 많이 수출된다"며 팜유를 '콕' 집어 언급해 상상력을 자극한 겁니다. '팜유를 염두에 두고 언론을 떠본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기름야자 열매를 짜낸 기름으로 식용유 원료인 팜유는 새우깡 같은 스낵을 튀길 때 주로 쓰이는데요. 팜유 4,800억 원어치 물량을 국내로 들여와 어떻게 소화할 것이냐는 의문부터 듭니다. 더구나 팜유는 포화지방산이 많아 '몸에 좋은 기름'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럴 바엔 인도네시아산 바나나를 들여오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를 의식한 듯 방사청 관계자는 "팜유를 받아 시중에 풀지 않고 국내 상사를 통해 해외에 되파는 방법도 있다"며 "국내 업체가 손해를 보는 협상은 절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는데요.
다만 일반 국민의 눈엔 '굴욕 협상'으로 비칠 가능성도 큽니다.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전투기에 '팜유 대납'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닐 테니까요. 무엇보다 대한민국 무기 거래사에 기록될 '최초의 현물 대납' 사례가 팜유가 된다면 추후 있을지 모르는 현물 거래에서 두고두고 참고가 될 것이고요.
KF-21 공동개발 파트너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인도네시아가 보여준 변덕스럽고 미덥지 못한 행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는 2015년부터 함께 차세대 국산전투기 개발에 나섰는데요. 올해 4월 정식 명칭(KF-21)을 얻을 때까진 'KF-X(한국형 전투기 사업)'로 불린 이 사업은 인도네시아에선 IF-X로 통합니다. KF-21개발이 완료되면 인도네시아가 시제기 1대와 함께 기술을 넘겨받아 현지에서 IF-X 48대를 생산하는 것이 공동개발의 골자인데, 2017년부터 "경제사정이 어렵다"며 분담금을 연체하기 시작한 겁니다.
2018년 9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공동개발 의지를 재표명한 이후, 2019년 1월 일부 금액을 보내며 성의를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 미납이 이어지면서 신뢰에 금이 간 겁니다. 이달 기준 연체액은 8,000억 원으로 지금까지 납부한 금액(2,270억 원)의 4배에 달합니다.
지난해 3월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이유로 경남 사천 KAI에 파견했던 자국 기술진 114명까지 철수시켜 버렸고요. 올 초엔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이 무기 도입 다각화를 선언,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를 도입하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우리 군 당국의 속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가 올 4월 경남 사천에서 진행된 KF-21 시제기 출고식에 참석한 이유도 강은호 방사청장이 그의 집무실 앞에서 6시간 넘게 기다리며 방한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방사청이 불확실한 파트너인 인도네시아를 손절하지 않는 건, 개발비 때문만은 아닙니다. KF-21 사업의 성패는 개발 완료 후 전투기 판매 실적에 달려있기 때문인데요. 전투기는 300대 이상 생산해야 이익이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데, 우리 군에 인도될 120대만으로 이윤을 남기기 어렵습니다.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 거점국을 끼고 있어야 향후 KF-21의 시장개척이 유리해지는 겁니다.
인도네시아의 ‘과거’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최초로 개발한 훈련기 KT-1과 초음속 고등훈련기인 T-50, 장보고급 잠수함을 구매한 단골 방산고객입니다. 특히 2011년 2월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방한한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당시 T-50 구매와 관련한 인도네시아의 협상 전략 파악이 목적이었습니다. 역대급 외교적 결례에도 인도네시아는 사건을 눈감아주고 당시 우리의 경쟁상대였던 러시아의 Yak-130과 체코의 L-159B가 아닌 T-50을 구매했습니다.
수십년 간 방산 파트너였던 양국은 '현물 거래'로 KF-21 공동개발의 난관을 넘으며 그 동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이 서로 윈윈(win-win)하는 꽃길이 될지 험로가 될지는 내년 초 현물이 무엇으로 정해지느냐에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