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라이스

입력
2021.11.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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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대학교 앞에 있던 카페 두 곳이 기억난다. ‘후두둑’ 하고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카페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비 오던 거리에 맑은 해가 쨍하고 나면 학생들이 카페 ‘비 갠 날’로 모여든다. 사람은 이처럼 공감되는 말에 움직인다.

소위 세계화 바람이 불던 1990년대에는 가게 이름으로 국적 불명의 외국어가 유행을 타고 번졌다. 경양식 집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밥’이 아닌 ‘라이스’로 말하는 것이 거의 공식이었다. ‘김치볶음밥’은 분식점에서 파는 것이고, ‘김치라이스’는 고급 레스토랑의 것과 같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팽배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한류 스타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지금, 그간 외국어에 휘둘리던 가게 이름들이 우리말로 바뀌기 시작했다. ‘쉼표, 공기 반 소리 반’과 같은 이름은 만화를 보면서 쉬는 카페이거나 노래방에 쓰인 이름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알고 말의 힘에 눈을 돌린 것이다.

최근에는 잊고 지내던 기억을 불러내는 가게 이름도 많이 보인다. ‘다락방, 청춘상회, 청춘극장, 옛날통닭’ 등, 한때 촌스럽다며 피하려던 말들이 마치 “나 아직 살아있어”라고 하듯 간판 여기저기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다. 추억을 소환하는 말은 노익장들의 ‘청춘’을 되살리면서 좋은 판매 전략이 되고 있다. 소박한 음식을 푸짐하게 나누겠다는 ‘더담식당, 다담뜰’은 정 문화를 강조한 식당 이름이다. 또한 ‘건강한, 튼튼, 푸른, 바름, 곧은, 늘사랑’과 같은 말은 병원이나 약국에 잘 어울린다. 한국인의 삶을 투영하는 데 어떤 말이 한국말보다 더 나을 수가 있을까?

한때 ‘웰빙’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사전에서 웰빙이란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나 행동’이라 하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웰빙은 건강에 좋은 음식을 뜻하는 것처럼 쓰였다. 건강과 관련된 업종에서는 여전히 ‘웰’을 붙여 말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글자란 그림과 달리, 비록 눈에 보이더라도 의미를 그대로 전하지는 못한다. 꽃집이 굳이 ‘플라워’, 미장원이 ‘헤어’가 되어야만 그 수준이 높아지는가? “빵으로 드릴까요? 라이스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밥 주세요”라고 담담하게 답하던 30년 전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