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언론에서 아동학대 사건을 본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에 사람들은 공분한다. 주목받는 사건은 언젠가부터 '양모' 따위의 단어가 들어간 특정 키워드로 변한다. 가해자의 신상과 특정 사연이 밝혀지며 엄벌을 촉구하는 규탄이 일어난다. 문제점을 짚는 기사가 몇 개 나오고 사건이 잊힐 때 즈음 또 다른 아동이 살해된다. 그리고 분노는 다시 시작된다.
아동학대는 일개의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적어도 그렇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일련의 사건에는 맥락이 있고 제도의 미비가 있고 피와 눈물을 흘리는 아이가 핵심에 있다. 그때마다 분노해서는 바꿀 수 없다. 최근 8년간 아동학대로 죽은 아이는 217명이다. 2019년과 2020년 모두 한 해에 40명이 넘었다. 아이들은 꾸준히 죽어가고 어른들은 꾸준히 잘못을 저지른다. 열흘에 한 명꼴로 아이가 죽는다. 그 하나하나가 우리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죽음에서 교훈을 얻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이 작업을 수행해서 사례집 '문 뒤의 아이들'과 온라인 아카이브 '대한민국 아동학대, 8년의 기록'을 만들었다. 지난 8년간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이들의 사연을 일일이 채집해서 기록하는 작업은 커다란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을 펼쳐보는 행위 또한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기엔 아이의 별명이 '복숭아'였거나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소풍 가고 싶다'였다는, 평범하지만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어 눈물 나는 사연과, 빚 독촉을 받는 부모를 따라 고시텔이나 모텔을 전전하면서 죽도록 폭행당하는 아이와, 굶어 죽기 전 배관을 타고 탈출해 허겁지겁 과자를 주워 먹는 아이와, 갈비뼈가 모두 부러지고 팔이 뽑혀나가는 아이와, 우유 네 팩과 함께 6개월간 방치되어 굶어 죽은 세 살 아이와, 사후 멍자국을 빼기 위해 뜨거운 물에 넣어지는 아이가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전신의 피가 달아나는 기분이다. 이와 더불어 학대의 징후를 놓친 사회와 멀쩡히 법으로 남아 있던 징계권과 담당 공무원의 과중한 업무와 인프라의 부족, 제도의 미비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일대기는 차마 똑바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똑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숨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엄연히 벌어진 일이다. 이미 우리 잘못으로 아이들은 죽었다. 또한 단순히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인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다. '문 뒤'에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은 아이다. 모두가 마지막 한 명까지 '문 뒤'의 아이를 찾아내 지킬 의무가 있다. 이를 힘을 지닌 역사로 기록할 때 우리는 책임과 의무와 방지책을 논의할 수 있다.
나는 의사로서 죽은 아이를 직접 본다. 그때마다 절대적으로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자 육체라는 생각에 든다. 사례집에서 내가 담당했던 아이가 학대당해 실려온 과정을 보았다. 양육비가 밀려서 위탁모는 아이를 굶겼다.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지만, 구타가 두려워 '돌아'라는 말에는 반응해 몸을 간신히 움직이다가, 굶어 죽기 전 경기한 채 서른여섯 시간 동안 방치되다가 왔다. 아이는 고작 15개월이었고 우리는 아이를 살리지 못했다. 제발 이 세상 누구도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은 세계 아동학대 예방주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