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유가 잡기' 총력전... 美정유사 불공정 조사, 한중일엔 "비축유 방출"

입력
2021.11.18 20:00
FTC에 정유업체 불법 행위 조사 촉구
OPEC 증산요구 거절에 동맹국 동원도
근본 해결 어려워 '정치적 쇼' 평가절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날로 치솟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결국 칼을 빼 들었다. 안에서는 규제 당국을 향해 ‘에너지 기업의 불공정 거래 의혹 조사’를 촉구하고, 밖으로는 동맹국뿐 아니라 세계 패권을 두고 다투는 중국한테까지 “석유 비축분을 함께 풀자”고 제안했다. 브레이크 없는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압력이 자신의 지지율마저 폭락시키는 악재로 작용하자, ‘유가 안정’을 내세워 임기 초반부터 흔들린 정권 입지를 다지겠다는 포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총력전에도 불구,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터라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고유가 억제 위해 '전방위 대응'

17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을 종합하면, 바이든 대통령은 국제 유가 급등세를 억제하기 위해 전방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우선 미국 내에서는 정유회사의 반(反)소비자 행태가 기름값 상승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압박에 나섰다. 그는 이날 불공정거래 행위 조사 권한을 갖는 연방거래위원회(FTC,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의 리나 칸 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지난달 가공 전 휘발유 가격은 한달 사이 5% 떨어진 반면, 혼합 가공을 마친 휘발유의 소비자가격은 3% 뛰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석유) 기업들이 높은 에너지 값으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 유무를 FTC가 살펴봐야 한다고 요청했다.

바이든의 행정부의 ‘고유가 잡기’ 노력은 나라 밖에서도 이어졌다. 동맹국뿐 아니라, 경쟁국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복수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미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 인도 등 석유 소비가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축유 중 일부의 방출을 고려해 달라’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유가 안정을 토대로 세계 경제 회복을 앞당기려면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한테까지 손을 내민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최근 수년간 무역, 기술, 인권 등을 두고 중국과 극한 갈등을 빚어 온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그만큼 미국이 절실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방증이다.

앞서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원유 공급 키를 쥔 산유국에 추가 증산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좀처럼 관철되지 않자 최대 원유 소비국을 동원해 압박에 나선 셈이다. 일단 백악관은 로이터 보도와 관련해 “글로벌 에너지 공급을 보장하고, 가격이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 않도록 다른 에너지 소비국과 대화하고 있다”면서도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고만 밝혔다. 즉답을 피한 것이다.

"유가 안정시켜 지지율 회복" 의도

바이든 행정부가 유가 안정화에 필사적인 배경은 물론, 7년 만에 최고점을 찍은 기름값 때문이다. 이날 전미자동차협회(AAA)가 집계한 미국 전역 주유소 휘발유 평균 가격은 1갤런(3.78L)당 3.41달러를 기록했다. 1년 전(2.12달러)보다 60%나 뛰었다.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선 무엇보다 기름값 인하가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다만 그 이면에는 유가 급등이 정치 위기로 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정권을 잡은 지 이제 1년도 안 지났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공급망 마비 사태 등 잇단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지지율은 올해 1월 취임 이후 최저 수준인 41%에 그쳐 국정 동력마저 잃을 처지다. 민주당 내부에선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 민감도가 매우 큰 기름값의 하락은 분위기 반전에 꽤 괜찮은 카드다. 무의식적으로 넘기기 쉬운 일반 소비재 가격과 달리, 휘발유 가격은 전국 주유소마다 크게 공지해 눈에 쉽게 띈다. 게다가 차량 없이는 사실상 이동이 어려운 미국인들에게 유가는 피부에 가장 잘 와 닿는 물가 지표 중 하나다. WP는 “일터로 향하려면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저소득, 중산층일수록 기름값에 민감하다”고 설명했다.

국민들에게는 “바이든 행정부가 유가 안정을 위해 적극 뛰고 있다”는 메시지를 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 대통령은 FTC가 (정유사의) 불법 행위를 적발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에너지 비용 상승을 막기 위해 (정부가) 무언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에서 나온 지시”라고 분석했다. 로이터도 “만약 각국이 석유 비축분을 (미국 요청대로) 방출할 경우,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적어도) ‘바이든 정부가 물가상승 국면에서 손을 놓아 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단 유가 상승세는 실제로 한풀 꺾였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2월물 WTI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2.97% 급락한 배럴당 78.3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달 7일 이후 최저치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꺼내 든 ‘묘수’가 장기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불러오진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 시장 전문가들은 유가를 빠른 속도로 낮출 방법이 거의 없다고 본다는 게 외신들의 설명이다. 에너지싱크탱크인 에너지애스펙츠의 로버트 캠벨 원유상품 본부장은 “글로벌 (원유) 수급이 맞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조치를 ‘정치적 쇼’라고 평가절하했다.

허경주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