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부터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됐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미취학아동 대상 텔레비전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에 한국계 미국인 캐릭터가 출연하게 됐다. 이는 국내에서도 화제지만, 미국에서는 소수자성에 대한 수용을 '강요'한다는 보수 진영의 비판으로 인해 '정체성 정치' 논란으로 비화하고 있다
15일 AP통신이 '세서미 스트리트'에 일곱 살 된 한국계 미국인 설정의 '지영'이 머펫(인형)으로 등장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의장을 맡은 매트 슐라프는 트위터에 "어니와 버트(세서미 스트리트의 주요 출연진 머펫)는 무슨 인종인가. PBS 너희들은 미쳤다. 우리는 당신들의 자금줄을 끊어야겠다"고 주장했다.
주황색(어니)과 노랑색(버트)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피부색을 지닌 인형에 무슨 인종적 정체성이 있단 말인가. 슐라프의 질문은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세서미 스트리트'에 인종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는 이미 여럿 존재한다.
1970년에도 겉으론 마젠타(자홍색)이기는 하지만 명백히 흑인의 정체성을 지닌 머펫 '루스벨트 프랭클린'이 등장했다. 다만 이 캐릭터는 당시 고정관념을 오히려 강화한다는 지적 때문에 사라졌다. 반면 스페인어로 말하며 라틴계를 대변한 '로시타'는 1991년에 처음 출연해 장수한 주요 캐릭터가 됐다. 비교적 최근 등장한 '게이브리얼'과 사촌 '타미르', '웨스'와 부친 '일라이자'는 모두 흑인이다.
과거부터 세서미 스트리트는 미취학 아동 대상 방송이지만 어려운 정치적 문제도 정면으로 묘사해 왔다. 다양성 또한 오래전부터 이 방송의 핵심 가치였다. 초창기부터 인간 출연자는 최대한 다양한 인종과 연령, 성별을 기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머펫의 배경도 다양해졌다. '칼리'는 입양아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없애기 위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친절한 캐릭터로 묘사됐다. '줄리아'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세 살 소녀인데,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와 그 부모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올해 4월 ABC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세서미 스트리트: 맑은 날 50년'에 출연한 쇼의 제작감독 제이슨 웨버는 "최초에 짐 헨슨(머펫의 창조자)이 만들었던 캐릭터에는 인종적 특성이 없었고, 이들의 색은 모두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어 "지금은 인종과 인종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타미르, 웨스와 일라이자는 흑인, 지영은 아시아인 차별 문제를 다루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제작사인 비영리단체 '세서미 워크숍'은 흑인 머펫을 여럿 등장시킨 후 아시아인 머펫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근 벌어진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비롯해 혐오 범죄가 특별히 아시아계를 겨냥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지영은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자기 이름을 설명했다. "한국 전통에서 이름 글자는 따로따로 의미가 있거든요. 지영의 지(智)는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뜻이고, 영(英)은 용기와 강인함을 의미하죠. 근데 찾아봤는데, 지(芝)에는 참깨(지마·芝麻)란 뜻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한국계 설정은 그를 만들어낸 인형 연기자 캐슬린 김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영이 한국계인 이유는 연기자 자신이 한국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아시아인을 하나로 뭉뚱그려 취급하는 경험을 해 왔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한국계여야 했다"며 "그냥 한국인이 아니라, 여기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지영은 타미르와 웨스, 일라이자 등 다른 '인종 문제'를 다루는 머펫처럼 '업스탠더(침묵하는 것이 편할 때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가 되는 법을 아이들에게 알리고자 등장한다. 그렇다고 인종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전자 기타를 연주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 등 다른 소재로도 꾸준히 출연할 것으로 예상된다.
25일 방영 예정인 지영의 데뷔 쇼에는 극중 지영을 응원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 북미 지역의 유명 아시아계가 줄줄이 등장한다. 마블 영화 '샹치'의 주연으로 이름을 알린 연기자 시무 리우,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 TV쇼 '톱 셰프' 진행자 파드마 라크시미 등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한국계 미국 만화가로, 현재 DC코믹스 발행인 겸 최고창작책임자(CCO)를 맡고 있는 짐 리도 출연진에 포함됐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흥분되고, 설레고, 영광이다"라며 "만화를 읽고 세서미 스트리트를 보며 영어를 익힌 어린 이민자 아이로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이루게 됐다"고 소감을 냈다.
'세서미 스트리트'에 한국계 캐릭터가 등장하자 국내 네티즌들은 '신기하다'는 반응 속에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있지 않는가'라며 자성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미국에서는 슐라프 같은 보수 진영이 이를 노골적으로 정치 쟁점화하는 모습이다.
인종 차별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다툼의 뇌관이 된 상태다. 흑인을 대상으로 한 경찰의 과격한 대우를 비판한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 아시아계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 to Your Country)'는 표현을 썼다는 불만 토로 등이 2020년 대선을 거치며 이른바 반(反)트럼프 정서 강세로 이어졌다.
이에 보수 진영은 '미국적 가치를 수호하자'는 주장으로 맞서며 결집하고 있다.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을 강제 교육시켜 백인에 대한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이들의 주장으로,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공화당 후보 당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이 '세서미 스트리트' 공격의 이유는 아니다. PBS는 원래부터 공화당의 눈엣가시였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공공성을 기치로 정부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슐래프가 "자금줄을 끊자"는 얘기를 꺼낸 맥락은 여기에 있다.
실제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거슬리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보수 진영의 유명인들은 공세를 벌이고 있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최근 '세서미 스트리트'의 주역인 '빅 버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접종했다는 발언을 하자 "다섯 살에게 정부 선전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이에 대해 빅 버드가 홍역 예방접종을 하는 1972년 에피소드를 영상으로 올리며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