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을 꾸릴 권리

입력
2021.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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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보다 더 무서운 말은 '가족'이다. '정상가족'이란 명명은 '비정상가족'이 다수 출현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기존의 요건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혼인한 남녀 및 미성년 자녀로 구성되는 생활공동체'라는 인식이 절대적인 사회는 '정상가족'이라는 명명이 필요 없다. 그냥 '가족'이라고 하면 된다. 혼인과 혈연 외의 그 어떤 관계도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상가족'이란 말은 비정상일지라도 다른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사회적 인정이 포함돼 있다.

한국 사회는 혈연과 혼인 중심의 가족주의가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해체의 속도 또한 빠르다. 오랫동안 '가족'은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정화되는 신성불가침의 성소였지만, 언젠가부터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고 '정상가족'을 입에 올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됐다. 지난해 6월 여성가족부가 전국의 만 19세 이상 79세 이하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혼인 및 혈연 여부와 상관없이 생계와 주거를 공유해야 한다는 의견에 69.7%가 동의했다. 법령상 가족의 범위를 사실혼과 비혼 동거까지 넓히는 데는 61.0%가 동의했다. 이 조사만 놓고 보면, 이미 과반수가 혈연 및 혼인과 상관없는 '사회적 가족'의 법적 성문화에 찬성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십수 년 전부터 가족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입법안을 몇 차례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행 법률에서 정한 '가족'의 요건은 혈연과 혼인의 외부를 거의 허용하지 않고 있다. '주택법', '주택임대차보호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등에서 '사회적 가족'은 당사자의 권리를 갖지 못하거나 지원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국민 의식의 변화 속도를 입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사회적 가족'의 입법이 지체되는 것은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정상가족'을 보호해야 된다는 반동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또 전형화된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너무 오랫동안 상상해온 까닭에 가족 다양성의 가치에 대한 동의보다 다양한 가족의 실재 양상이 주는 낯섦이 더 격한 거부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회적 가족'의 인정은 '정상가족'의 탈신비화와 함께 간다. 가족이 혈연이라는 '자연'과 혼인이라는 '운명'으로 탄생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神話)다. 사실 혼인의 유지는 사랑도 있지만 경제적 타산도 있다. 사랑이 없는 혼인의 결속은 사랑이 있는 동반자 관계보다 불안정하다. 혈연(血緣)도 '피'(血) 자체보다 '인연'(緣)이 중요하다. 혈연으로 맺어진다는 것은 생활을 함께할 기회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혈연의 결속은 피 자체의 효과가 아니라, 공동생활, 상호돌봄, 정서적 지원 등과 같은 사회적 경험의 공유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사회적가족’과 ‘정상가족’의 구별은 어불성설이다.

여성가족부가 올해 4월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에는 '가족'의 정의와 범위를 새로 규정하고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을 막을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제 '가족'은 상호돌봄과 정서적 지원을 교환하며 생계 및 주거를 함께하는 개인들의 결합을 포괄하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개인에게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박수진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