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천막당사를 하던 마음으로 후보가 당내 비상사태라도 선포해야 할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여권의 책사로 꼽히는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 17일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준비상황을 작심 비판했다. 지난해 4월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이끈 뒤 두문불출했던 양 전 원장이 여의도를 찾아 공개 경고음을 울린 것은 대선을 바라보는 여권 내 위기감이 크다는 뜻이다.
양 전 원장은 이날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당 영입인재·비례대표 의원모임 간담회에 참석해 민주당의 대선전략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참석자들은 21대 총선에서 영입된 초선·비례 의원들이다.
그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위기감이나 승리에 대한 절박함, 절실함이 안 느껴진다"며 "의원들은 한가한 술자리도 많고, 누구는 외유 나갈 생각이나 하고 있고 아직도 지역을 죽기 살기로 뛰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라고 직격했다. 이어 "대선이 넉 달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이렇게 유유자적 여유 있는 분위기는 우리가 참패한 2007년 대선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후보만 죽어라 뛰고 있다"며 솔선수범해야 할 지도부와 중진들을 겨냥했다. 그는 "책임 있는 자리를 맡은 분들은 벌써 마음속으로 다음 대선, 다음 대표나 원내대표, 광역단체장 자리를 계산에 두고 일을 한다"면서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탄식이 나온다"고도 했다.
계파별로 직책을 나눠 가진 '원팀 매머드' 선거대책위원회와 관련해선 "희한한 구조"라며 콕 짚었다. 그는 "(계파 안배의) 취지와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권한과 책임이 다 모호하다"며 "명확한 의사결정 구조를 못 갖춘 매우 비효율적인 체계"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처럼 후보 개인기로만 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후보의 핵심 측근들과 선대위 핵심 멤버들이 악역을 자처하고, 심지어 몇 명은 정치를 그만둘 각오까지 하고 후보를 중심으로 키를 틀어쥐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선대위 내 '광흥창팀' 같은 소수 정예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과감한 전략 수정도 주문했다. "모든 대선에서의 관건은 중도 확장 싸움"이라며 "현재 우리 쪽 의제와 이슈는 전혀 중도층 확보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다. 이어 "앞으로 두세 주 안에 이런 문제를 궤도 수정하지 않으면 지금 지지율이 고착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판을 뒤집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양 전 원장이 선거전략을 맡았던 네 차례의 전국단위 선거 중 2012년 대선을 제외한 세 차례(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20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선대위 출범 이전부터 자문 등을 통해 이 후보를 간접 지원한 터라, 당내에선 "이번에도 구원투수로 등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양 전 원장은 그러나 간담회 후 선대위 참여와 관련해 "요청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굳이 나서야 하냐는 생각"이라며 "바깥에서 후보에게 필요한 조언이나 자문을 하는 게 낫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현재처럼 이 후보의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힌 상황이 지속된다면 선대위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당내 '양정철 역할론'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강연에서 문 대통령 퇴임에 맞춰 정치에서 퇴장할 계획을 밝혔다. 이날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양 전 원장의 발언은 원문에 가깝게 언론에 공개됐다. 참석자뿐 아니라 당 안팎에 경각심을 주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한 참석자는 "질의응답 과정에서 현재 선대위가 특별한 각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선수(選數) 배분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지적이 나왔고, 공감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