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행산 동쪽 산둥은 기원전 춘추시대 제나라와 노나라의 고향이다. 제노(齊魯) 문화가 풍부하다. 연과 판화로 유명한 웨이팡, 후이족 거리 칭저우, 맹자 후손의 비단 가게가 있는 쯔보, 표돌천이 있는 지난, 태산이 있는 타이안, 공자 사당과 무덤이 있는 취푸, 묵자·노반 기념관과 타이얼좡 고성이 있는 짜오좡으로 문화여행을 떠난다. 모두 4편으로 나눈다.
기원전 주나라 무왕이 강상(姜尚)에게 분봉했다. 낚시꾼 강태공으로 유명한 그는 제나라 제후가 됐다. 칭다오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웨이팡도 제나라 문화권에 포함된다.
바람의 친구인 연, 즉 풍쟁(風箏)의 고향이다. 나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다. 연에 솔개 그림을 그리면 가장 멋들어져 보여서일까. 연도(鳶都)라는 그럴싸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민간 공예가 돋보이는 판화인 연화(年畫)의 고향이기도 하다. 연에 역사를 그리고 판화로 새겨 해학을 담은 회화의 도시다. 연과 연화를 모두 보려고 양자부(楊家埠)로 간다.
시 외곽에 양자부촌이 있다. 정식 명칭은 민간예술대관원(民間藝術大觀園)이다. 남문 광장에 복록수(福祿壽)를 관장하는 삼성신(三星神)이 높이 솟아 환영해준다. 상징인 원보, 여의, 복숭아를 들고 있다. 재물을 부르는 초재(招財) 광장이다. 돈 뿐만아니라 명예도 장수도 모두 재물의 부분집합일지 모른다. 아이들 조각상이 꽤 많다. 엽전 달린 나무에 올라 놀기도 하고 연꽃을 들고 물고기에 올라탄 아이도 있다. 우화와 익살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연 박물관이 나온다. 먼저 눈에 잡힌 연은 매를 그려 만든 노응(老鷹)이다. 바람을 휘젓고 하늘을 날면 모를까 그저 온순하게 만들어진 매다. 부드럽고 담백하게 날개를 그려서 사납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연은 매처럼 날아야 멋지다. 진짜 새처럼 날지도 모른다.
명나라 초기 판화를 조각해 그림으로 찍어내던 양자부 민간 예술인이 있었다. 연 장식에 판화 기법을 도입했다. 판화로 찍어내거나 직접 그려 그저 평범하던 종이에 색감을 입히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연화를 제작하는 기법을 전승한 덕분이었다.
연은 양 날개로 난다. 비익제비(比翼齊飛)는 연의 본질을 잘 드러낸 작명이다. 비익조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새로 눈과 날개가 하나인 암수 한 몸으로 비상한다. 부부나 자매를 비유하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라 해도 된다. 연으로 제격이다. 쌍비(雙飛)라고도 부르는데 제나라 땅에서 ‘함께 가지런한’ 제비이니 더욱 친근해 보인다. 대칭으로 구현되니 흔히 ‘자매예술’이라 부른다. 십장생을 부채처럼 가슴에 달고 하얀 코와 빨간 입, 검은 콧수염의 칠품현관(七品縣官)도 있다.
아이가 복숭아를 들고 있는 동자헌수(童子獻壽)는 아주 작은 크기다. 콧바람에 날릴 정도다. 노파와 영감,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날아다닌다 하니 신기하다. 서민의 익살을 달고 하늘로 오른다고 상상해보라. 용머리와 지네를 그린 용두오공(龍頭蜈蚣)은 사진으로 짐작할 뿐이다. 무려 360m 길이의 연이었다. 36m가 아니다. 세계 최고라 자랑하고도 남는다. 1978년에 열린 전국풍쟁시합에서 우수창작상과 비행 1등상을 받았다. 양자부 사람인 양퉁커가 만들고 비행 시범을 보였다. 풍쟁왕 칭호를 받았다.
박물관 뒤쪽에 풍쟁 공방이 있다. 용머리가 앞에 서고 수없이 많은 지네가 뒤따르는 연이 있다. 360m의 용두오공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어설퍼 보이는데 완성품은 마음을 끈다. 판매도 한다. 당나라 화가 오도자가 그린 공자행교상(孔子行教像)이 재현된 연이 있다. 공자가 하늘을 난다고 하니 재미롭다. 고대 4대 미인은 세트로 판다. 하늘에서도 미모를 겨루면 흥미로울 듯하다.
동쪽으로 돌아가면 연화 박물관이 나타난다. 복으로 재물이 생긴다는 발복생재지(發福生財地) 연화가 대문에 붙어 있다.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문신(門神)인 신도(神荼)와 울루(鬱壘)를 덧붙였다. 겉장이 찢겨 있는데 안쪽 그림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러 장 덕지덕지 붙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신도와 울루 연화가 전시돼 있다. 바깥 대문의 연화와 똑같다. 고대 신화를 엮은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문을 지키고 악귀를 조사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귀신 잡는 도교의 신인 종규(鍾馗)도 있다.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를 체포하기 위해 매복한 관우와 부하 장수의 진용을 그린 화용도(華容道)도 화려하다.
연화의 원판도 있다. 수비남산(壽比南山)에는 학과 소나무가 펼쳐진 세상에 복숭아를 든 동자와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 등장한다. 남산은 시안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을 말한다.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가 말년에는 남산에 살고 싶다고 시를 지었다. 도사가 많이 살던 산이라는 전설이 있다. 장수하라는 축원이다. 원판은 색감을 칠해 종이에 찍어내야 하니 칼질을 거꾸로 한다. 바다에 고기가 뛰놀고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배의 돛에 그 흔적이 나타난다. 일이나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라는 염원인 이판펑순(一帆風順)이다.
연화 공방이 옆에 있다. 둥글고 보드라운 붓으로 물감을 골고루 바른 후 종이를 놓고 살살 문지른다. 조각도로 또박또박 아로새기면 수많은 연화가 줄줄이 사탕처럼 탄생한다. 색감을 고르고 종이만 있으면 약간의 손길로도 예술작품이 묻어나게 된다. 대문에 붙은 신도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 신화와 전설, 역사를 동원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연화다. 땅에 머물기 아까워 공중으로 부상한 연으로도 옮겨갔다. 이 또한 연화(風箏畫)가 아닐는지.
서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칭저우로 간다.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서경에 구주(九州)의 범위를 기록했다. 그중 하나로 등장하는 지명이다. 중원의 동쪽을 포괄하고 있으며 지금의 산둥 일부로 추정된다. 고대의 지리 개념으로 동방은 오행 중 나무라 인식했다. 나무는 곧 푸를 청(青)이다.
신비에 가까운 문헌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지금은 웨이팡에 속한 현급시다. 중국 문화부가 2009년에 제1회 역사문화명가(歷史文化名街) 10곳을 선정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최고의 거리를 망라했다. 칭저우에 있는 자오더고가(昭德古街)가 뽑혔다.
자오더고가는 후이족(回族) 거리다. 옛날 페르시아에서 건너와 중국 땅 곳곳에 안주한 민족이다. 꼬불탕한 글자가 곳곳에 붙어 있다. 중국어로 설명이 없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무슬림 사원인 진교사(真教寺) 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칠판 위에 낯선 기호가 적혀 있다. 페르시아어와 중국어를 함께 적었다. 언어 공부를 시키나 보다.
이슬람교의 ‘알라’를 뜻으로 풀어 진주(真主)라 썼다. 보통은 발음대로 옮겨 안라(安拉)라고 한다. 천선(天仙), 경전(經典), 사자(使者)도 있다. 원나라 시대 1302년에 처음 세웠다. 3대 무슬림 사원으로 70칸 규모였다는데 지금 많이 왜소하다.
마당에 민족평등(民族平等) 비석이 있다. 후이족 출신으로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을 역임한 양징런이 1988년 진교사에 왔다. 이때 남긴 필체다. 정협은 공산당과 민족, 종교, 민주당파 등이 참여하는 통일전선 조직이다. 문제가 있으면 자꾸 강조하고 싶은 듯하다. 비석 뒤에 하루 다섯 번 예배하는 시간을 적었다. 아침 예배인 신례(晨禮)는 6시 10분에 시작한다. 대낮에 상례(晌禮), 오후는 포례(晡禮), 해가 질 때면 혼례(昏禮), 밤이 되면 소례(宵禮)로 구분한다. 물론 중국어로 썼다.
거리는 한산하다. 최초로 선정된 문화거리를 대부분 방문했다. 자오더고가가 가장 낙후된 듯하다. 주변에 뚜렷하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없으니 함께 발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옛 모습 그대로 주민의 삶이 잘 드러나는 거리로 남았다. 원주민이 아니라 이주한 민족이라 전국 어디에도 산다. 관광객이 거의 없으니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난다. 야외 시장에는 방금 잡은 양고기가 통째로 걸려 있다.
또다시 서쪽으로 1시간 30분 이동하면 제나라의 중심이던 쯔보가 있다. 산둥 상방인 노상(魯商)이 활동하던 거리로 알려진 주촌고상성(周村古商城)으로 간다. 강과 바다가 아주 멀다. ‘물 없는 부두’인 한마터우(旱碼頭)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상품 왕래가 잦다는 의미로 사용한 부두인 셈이다. 명나라 이후 상업이 번창했으며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상점이 많다. ‘살아있는 옛날 상업 건축 박물관’이라 극찬한다.
먼저 청나라 시대 우체국인 대청우국(大清郵局)이 나온다. 청나라 우체국을 가끔 만나는데 주로 상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거리에는 옛 가게들이 다닥다닥 이어진다. 상호는 변했고 유적지 안내판이 많이 걸려 있다. 인쇄소인 삼익당(三益堂) 자리가 있다. 귀신과 요정, 도깨비가 등장하는 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는 18세기부터 베스트셀러다. 쯔보 출신 포송령의 작품이다. 1767년에 현 관리인 왕금범이 삼익당에서 인쇄했다.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은 판본으로 저장성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은행인 장성공(長盛公), 약국인 덕생당(德生堂), 찻집인 천상차장(泉祥茶莊), 숙박시설인 공성주점(公盛酒店), 서예 문구점인 승문신(承文新) 등의 흔적이 계속 따라온다. 일본인이 만든 무역회사 대부양행(大富洋行)과 미국인이 만든 석유회사 홍기유잔(鴻記油棧)도 있다. 20세기 초반에 나름 글로벌 비즈니스 무대였다. 무엇보다 서부상(瑞蚨祥)을 보고 싶었다.
1862년 맹자의 후손인 맹전산이 비단 가게를 창업했다. 아들인 맹락천이 이어받아 전국 최고의 비단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베이징을 비롯해 전국 24곳에 지점을 설치했다. 맹락천의 상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성공한 상인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가게 안에 새긴 16자를 새겨본다.
자연재해나 흉년이 들면 부채를 당장 갚았다. 다른 사람의 부채는 탕감해주는 상인이었다. 유교 학풍이 강한 상인을 유상(儒商)이라 한다. 맹자 후손으로 상도를 지켰다. 국민당 통치 시기를 거치고 항일 전쟁으로 서부상은 거의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45년 해방 후 정부와 민간의 지원으로 가게가 다시 회생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건국을 선포할 때 천안문 하늘에 휘날린 오성홍기는 서부상의 비단으로 제작했다. 베이징의 서부상은 지금도 비단 가게로 성업 중이다.
가게 이름에 곤충이 있다. 매미 또는 물벌레 비슷하게 생긴 전설 속의 청부(青蚨)다. 피를 지전에 묻히면 다시 돌고 돌아 주인에게 되돌아온다는 청부환전(青蚨還錢) 고사가 있다. 이윤은 적어도 많이 판다는 박리다매의 뜻도 있다. 월마트 창업자가 동기 부여가 된 ‘동양의 한 작은 가게’를 언급했다. 서부상의 고사를 들었다.
주촌의 명물은 샤오빙(燒餅)이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 화덕에 굽는다. 전통 과자로 누구나 만들어 먹었다. 19세기 후반 곽운룡이 샤오빙 가게인 취합재(聚合齋)를 열었다.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편이었다.
어느 날 아들인 곽해정이 차를 사러 맹락천이 운영하는 차장(茶莊)을 찾았다. 맹락천이 반갑다며 차를 대접했다. 다과가 맛이 독특했다. 두툼하지 않고 얇고 노릇노릇했다. 깨가 살짝 붙었는데 바삭하고 고소했다. 심장이 뛰었다. 대접을 받고 곧장 귀가해 재료 배합과 제작 방법을 개선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신상품으로 내놓았다. 인기가 폭발했다. 조정에 납품까지 했다. 미식가인 서태후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청나라 말기에 기차역이 생기자 불티나게 팔렸다. 기차가 정차하는 동안 차창으로 샤오빙 파는 모형이 있다. 기차를 타고 전국으로 소문이 퍼졌다. 옛날 풍속이라 친근하게 다가온다. 반죽에 고기나 채소를 넣는 지방도 있다. 이름만 비슷하지 차원이 다른 맛이다. 농구공 정도 크기로 얇고 넓게 만든다. 직접 제작하는 공정도 볼 수 있고 구매도 가능하다. 한번 입에 대면 계속 손이 가는 맛이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누룽지 정도라면 비슷할 듯하다. 군것질로 최고다.
사거리에 비석 하나가 눈에 띈다. ‘오늘은 세금이 면세’라는 금일무세(今日無稅) 비석이다. 청나라 순치제 시대 형부상서 이화조가 세웠다. 친척 방문을 위해 고향인 주촌에 왔다. 영세 상인들이 세금 문제로 시달리는 모습을 알게 됐다. 관리와 토박이로부터 이중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건의해 ‘하루 면세’ 허가를 받는다.
하루만으로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화조는 서신을 보내 비석을 세우라 했다. 어길 때는 엄벌에 처한다는 문구도 새겼다. 비문으로 남겨 상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봉건시대가 종말을 고한 후에도 상인들의 자율 납세 정착에 기여했다. 왜 상업이 번창했는지 보여주는 징표다. 역사에서 나라가 발전하는 이유를 배우기도 한다. 발품을 팔면 더욱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