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동안 난민 수용에 호의적 입장을 취해 왔던 유럽연합(EU)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국경을 넘으려는 이민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는 건 물론, 일종의 금기나 마찬가지였던 ‘국경장벽 건설’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격화하고 있는 벨라루스발(發) 중동 난민 사태를 이민자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식한 탓이 크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EU 난민 정책이 전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폴란드와 벨라루스 간 난민 갈등으로 EU의 이민 정책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폴란드는 벨라루스에서 자국으로 들어오려는 중동 국가 출신 이민자들과 대치하고 있는데, 이 사태를 계기로 기존에는 거론조차 못했던 반(反)난민 정책들이 하나둘씩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국경장벽이다. 샤를 미셸 EU의장은 전날 “국경을 지킬 물리적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장벽 건설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단순히 말만 꺼낸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 이미 EU 지도부는 실현 가능성 검토에 착수했다. EU는 2014년부터 올해까지 24억 유로(약 3조2,413억 원)의 규모의 국경관리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다만 해당 예산 용도는 ‘이민자 감시를 위한 무인기(드론)나 적외선 카메라 구입’ 등의 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물리적으로 국경을 통제할 ‘벽’을 세워도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셸 의장은 전날 “유럽의회 법률고문들이 국경장벽 건설에 해당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장벽을 건설하기 위한 절차적 걸림돌은 없어진 셈이 됐다.
이 같은 EU의 태도는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 때와는 다르다. ‘강경 입장’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돌변했다는 얘기다. 이유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난민 위기'가 아니라,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공격'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데 있다. EU 회원국은 ‘자국에 부과된 제재에 반발한 벨라루스가 중동 이민자들을 유인해 폴란드와의 국경 지대로 보내고 있다’고 본다. 또 그 배후에는 러시아의 지원 또는 묵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이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서방 진영 대표단들은 성명을 내고 “벨라루스가 자국 인권 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돌리려고 이 사건을 기획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계기로 ‘EU 난민 정책 기조가 바뀔 수 있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AP통신은 “국경 대치 상황으로 인해 EU의 법과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난민을 적대시하는 각국의 극우단체 목소리도 조금씩 힘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 당사국인 폴란드에선 독립기념일(11일)을 맞아 극우 세력 수천 명이 수도 바르샤바에서 거리 행진을 벌인 게 대표적이다. 이들은 폴란드 국경 수비대의 강경 대응을 치켜세우면서 “앞으로 난민을 상대하는 더 강력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