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한 기업의 신입사원 채용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탈락한 김모씨.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막아 달라"며 올 5월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 발의에 나섰다. 김씨의 청원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공감을 받아 22일 만에 국회 심사 기준인 10만 명을 채울 수 있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9일 전체회의에서 이들의 바람이 담긴 차별금지법 제정 청원을 포함한 국민청원 5건의 심사기한을 2024년 5월 29일까지 미루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차별금지법 관련 청원의 심사기한(11월 10일)을 단 하루 앞두고 소리 없이 처리한 것이다. 이에 걸린 시간은 43초에 불과했다. 대선을 4개월 앞두고 연일 전쟁 중인 여야가 보수 개신교계 표심을 의식해 이 순간만은 '깐부'가 된 셈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해온 시민단체들은 비협조로 일관해온 국민의힘 외에도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민주당은 의석 수 우위를 앞세워 법사위에서 법안 심사에 나설 수도 있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여론과 국제사회 비판을 무릅쓰면서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에 나섰던 모습과 정반대다.
민주당에서도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상민 의원은 11일 "그동안 한 번도 논의하지 않다가 한두 달도 아니고 21대 국회 임기말까지 미루는 것은 '차별금지법을 하지 말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법사위의 책임 방기"라고 비판했다. 그는 법사위 소속이 아니라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야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법사위 민주당 간사인 박주민 의원은 "청원 5건에 대해서는 국민의힘이 위원장을 맡기로 한 청원소위가 진행되지 않아 심사기한을 연장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청원소위와 별개로 전체회의 차원의 공청회를 열어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원내 관계자는 "우리는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데, 민주당이 미루자고 해서 합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까지 여권 주도로 법안 논의가 시작되는 듯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검토할 단계"라고 밝혔고, 박완주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정기국회 안에 국민의힘 정책위와 차별금지법을 논의하겠다"고 화답하면서다.
그러나 법사위 결정은 청와대와 민주당의 진정성 여부에 물음표를 찍은 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했던 것과도 상충되는 결정이다. 정치권에선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8일 개신교계 인사들과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에 신중한 태도로 보인 것이 기류 변화로 나타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 후보는 차별금지법 제정엔 공감하면서도 "일방통행식 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