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 화가이자, 한국전쟁 피란민이었던 박수근을 집중 조명한 전시가 개막했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11일부터 시작한 박수근의 대규모 회고전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내년 3월 1일까지 이어진다.
박수근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박수근 작품은 값이 최고가인 데다, 우리나라 소장 문화 특성상 소장자들이 자기 소장품을 적극 드러내지 않아 그간 전시를 만들기 어려웠다”며 “이번 전시는 어렵게 소장처를 파악하고, 대여해 꾸린 것으로 일생일대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근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국민화가’ ‘서민화가’ ‘한국적인 화가’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박수근을 제대로 이해하기 좋은 기회라는 설명이다. 초기부터 말년까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비롯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10여 점까지 총 174점이 전시돼 있다.
1914년에 태어난 박수근은 12세 때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보고 감동받아 화가를 꿈꿨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야 했고,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같은 관전에서 수상하며 화가로 데뷔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1933년, 그가 19세 때 그린 ‘철쭉’과 이듬해 그린 ‘겨울 풍경’이 걸려 있다. 모두 수채화로, 질감이 두드러진 박수근의 대표작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다. 아방가르드와 같은 미술 용어를 기록하고, 서양화가의 작품을 스크랩하는 등 혼자서 미술 공부한 흔적을 비롯해 새, 나뭇잎, 돼지 등 생계를 위해 그렸던 삽화의 원화도 전시돼 있다.
박수근은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내 매점에서 초상화가로 일하기도 했다. 스카프 귀퉁이에 미군의 얼굴을 그려주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박수근은 소설가 박완서를 만나는데, 박완서는 훗날 박수근을 주인공으로 그린 소설 ‘나목’을 선보인다. 책 표지로도 사용된 적 있는 박수근의 대표작 ‘나무(나무와 두 여인)'는 총 4부로 구성된 전시 가운데 2부에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박수근은 가난했던 1950~1960년대를 살았던 이웃과 동네를 따스한 시선으로 그림에 담았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시장 사람들, 과일을 파는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노인, 판잣집, 창신동 풍경 등을 그렸다. 단순한 구도, 물감을 여러 겹 쌓아 나타낸 투박한 질감이 특징이다. 색감은 상당히 절제돼 있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층 밑에 초록, 빨강 등 원색이 깔려 있는 작품이 많다.
설명 없이는 박수근 작품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그림들도 전시돼 있다. 주로 여성이 등장하지만, 1963년 그린 ‘청소부’는 남성들이 주인공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웅크린 개'(1965) 역시 박수근의 대표작과는 느낌이 달라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전시 담당자인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사후 국민화가 타이틀을 얻긴 했지만 박수근은 당대에도 위상이 높았던 중견 작가였으며 전쟁 후 한국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록한 화가였다”며 “화가로서, 생활인으로서의 박수근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