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주부사원들은 왜 노동시간 단축을 반대했을까?

입력
2021.11.1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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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시간 노동문화는 인간다운 삶을 파괴한다. 이를 해결하려고 문재인 정부와 국회는 지난 2018년 법이 허용하는 근무시간을 단축했다. 새로운 근로기준법이 평일과 휴일을 구분하지 않고 일주일을 7일로 규정하면서 연장근로를 포함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은 총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었다. 이에 발맞춰 그해 1월부터 H그룹 산하 B대형마트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에서 7시간으로 줄었다. H그룹은 이러한 내용을 발표하면서 추가 고용도, 임금 감축도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밝혔다. 모두가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B대형마트 노동조합은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고 나섰다. 실제로는 임금이 감소하고 노동환경도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캐셔(계산원)로 일하는 전일제 무기계약직 사원들은 불안에 시달렸다. 그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된 '개혁'이 삶을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다수가 노동계층 중년 여성, 주부사원들이다.



대형마트 계산대로 떠난 연구자.

여성학 연구자 이소진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근로시간 단축이 일터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살림을 챙겨온 수많은 주부사원들에게 조금이나마 여유를 돌려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버스 안내양으로 밥벌이를 시작해 평생을 이런저런 직장에서 일해왔던 어머니, 밤늦게 퇴근하고서도 “예전에는 (공장에서) 철야도 했는데 뭘”이라면서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를 둔 연구자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반발이었다.

그래서 이소진은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B대형마트에서 4개월 남짓 일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당사자들을 인터뷰했다. 노동계층 중년 여성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를 파헤쳐 책을 썼다. 이달 출간된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이다.


여성도 생계 부양자…임금 줄어들어 타격

현장으로 들어간 이후에야 중년 여성 노동자들의 하소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소진은 썼다. 먼저 임금은 실제로 감소했다. 연장근로 자체가 사라지면서 임금 총액이 줄어들었다. 줄어든 근로시간을 이유로 향후 임금 인상폭을 낮출 가능성도 있다. 남편 혼자서는 살림을 꾸리기 어려워서 직업전선으로 뛰어든 중년 여성들에게는 무시하기 어려운 경제적 타격이다. 대형마트들은 주부사원을 ‘용돈 벌러 나온 엄마들’ 정도로 취급하지만 그들은 고작 용돈을 벌려고 계산대에서 인간적 모욕을 감당하지는 않는다.


근로시간 줄인다고 휴게 시간도 깎아

노동환경도 악화했다. B대형마트는 전체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작업자가 현장에서 실제로 노동하는 시간을 늘렸다.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들을 줄일 수밖에 없다. 30분에서 20분으로 줄어든 교대시간이 대표적이다. 캐셔들은 계산대에서 빠져 나와서 정산소에 현금통을 보관하는 한편, 상품권 잔돈 처리를 위해서 고객서비스센터에 들리기도 한다. 출퇴근 때는 탈의실도 동선에 포함된다. 여러 층을 오가는 경우도 있다. 화장실을 가거나 물통을 채우기조차 어려워졌다. 이소연은 ‘대형마트가 얼마나 큰 줄 아냐, 휴게실까지 걷다 보면 휴게는커녕 교대할 시간도 부족하다’라던 하소연을 믿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그게 사실임을 안다.



근무시간 유연화=계획하기 어려워진 삶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이윤을 높이려면 사측으로서는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근로시간 단축 이후로 캐셔들은 삶을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캐셔들은 몇 줄로는 요약하기 어려운 복잡한 교대체계, 근무표에 따라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교대한다. 근무표는 하루 전날 고지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노동자가 어느 날, 언제 출근하게 될지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구조다.

대기업들은 ‘엄마니까, 용돈 벌러 나왔으니까’라는 암묵적 인식을 바탕으로 주부사원들에게 이러한 업무구조를 강요한다. 같은 B대형마트 직원이라도 상대적으로 미래의 업무를 예측하기 쉬운 사무직과 캐셔들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예측 불가능한 삶을 감내하는 것은 주부사원들의 몫이다.


노동자는 동질한 집단 아냐...저마다 다른 상황 알아야

B대형마트 주부사원들의 근로시간은 줄었지만 생계 부담은 커졌고 일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동료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인간적으로 교류하기조차 어렵다. 주부사원들이 원했던 결과가 아니다. 주부사원들은 사측이 근로시간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의견을 물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로시간 단축이 불필요했다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를 ‘생계를 부양하는 남성’ 또는 '사무직 노동자'로만 상정한 국가와 기업들의 정책, 노동운동은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야기다. 노동자는 동질한 집단이 아니다. 성별과 연령, 고용형태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여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때 사회는 전진한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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