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는 명징한 문장 하나로 기억된다. 그것으로 그 장소, 그 나라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가보리라 다짐한다. 가끔은 뾰족한 화살촉이 되어 가슴을 뚫고, 때론 또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여행자의 자기암시적 기억법이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덜 도도한, 그런 곳에서 고삐 풀린 히피의 나날을 누리길 원했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칸쿤에서 68㎞ 남짓 떨어진 플라야델카르멘. 탕탕의 다리 부상으로 장기 체류한 이곳에서 한 일이라곤 틈날 때마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하고 이대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불안에 접어 들었을 때, 누군가 해변에 써 놓은 글귀 하나, ‘Live Life’. 따분함도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이고, 삶은 현재진행형이란 명제가 뚜렷해졌다. 언젠가 큰 썰물에 지워져 버린다 해도 가슴 속에 새겨진 글자까지 지울 순 없겠지. 그날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누군가와 동지 의식도 생겼다.
호주의 북부 다윈에서 남쪽으로 가던 길이었다. 대화도 웃음기도 싹 가실만한 허허벌판이 이어졌다. 약 600㎞의 국도를 달리다가 탈진 상태에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물과 표지판이 보인다.
좌측엔 설치미술을 연상케 하는 난해한 주유소가, 우측엔 대낮부터 소음이 새어 나오는 술집(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열 명도 살지 않는 마을에 펍이라니? 들어가 보니, 반전 문장의 파라다이스다. ‘술 마시는 동안엔 일하지 말라’ ‘감시카메라 앞에서 웃어라’ 등은 물론 전 세계 유랑자의 푸념 섞인 손글씨가 여행자를 피식피식 웃게 만든다. 사막 한가운데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는 것만큼이나 쾌청한 유머를 장전했다. 이왕이면 즐겁게, 또 다른 길을 나설 이유가 충분했다.
북적거리는 오아후섬 중심가에서 노스쇼어(North Shore)로 달리다 보니, 뜬 눈을 다시 한번 동그랗게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파인애플 농장이다. 하늘도, 농장도 포복한 상태로 눈높이에서 그림을 그린다. 추스르지 못할 환희 가운데 레이더망에 잡힌 단어가 있으니 ‘ONLY’다. 유일무이한 풍경이라고? 거기에 서 있는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는 듯했다. 착각이라면 큰 착각이었다. 실상은 버스만 이용 가능한 차선이라는 ‘ONLY BUS’의 일부였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도 달리 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게 분명하다. 가끔 여행 훈련법을 쓴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가 되면, 한국에서도 여행자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다. 한국어를 낯선 언어로 보고, 길가의 야생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오늘을 유일하게 본다.
아니 발리까지 와서 왜 굳이 체인점을 가야 하냐며 불평하던 참이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모티브로 한 레스토랑 ‘부바 검프 쉬림프(Bubba Gump Shrimp)’였다. 습관대로 실내를 사방으로 훑어보니, 뭔가 훅 치고 들어왔다.
‘바보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지.’ 심히 찔렸다. 후회하고 책망하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무한 질책했던 그 바보가 단단히 들킨 느낌. 귀로 들을 때와 시각적으로 잡아둘 때의 차이는 컸다. 깊은 생각에 빠지다 보면 걱정도 함께 쌓이는 걸 알기에,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바보처럼 한 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