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았던 범죄·액션 스릴러의 판이 확 바뀌고 있다. 여성판 '007'을 방불케 하는 파격적인 드라마가 나오는가 하면, 여성 작가와 PD가 제작하는 범죄·액션 스릴러가 잇따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변화로 공포의 소재도 약자인 여성 유린이나 부패한 권력 집단의 잔혹 살인에서 SF(공상과학), 소리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남성 PD와 작가가 남궁민을 역삼각형 근육질 사내로 탈바꿈('검은태양'·2021)시키고, 마동석('나쁜 녀석들'·2014)을 앞세워 묵직한 육탄전을 선보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 변화다.
JTBC 주말드라마 '구경이'는 두 여성을 바퀴 삼아 공포를 굴린다. 스릴러의 두 축인 연쇄살인마 케이(김혜준)와 그를 쫓는 탐정 구경이(이영애) 모두 여성이다. 여기에 구경이를 지원하는 정체불명의 용국장(김해숙) 또한 여성이다. 영화 '007' 시리즈를 지탱했던 본드, 사이코패스 악당, 정보보안위원회 국장의 삼각 편대를 모두 여성으로 꾸린 것이다. '구경이'의 실험은 여성을 둘러싼 통념을 산산조각 낸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10일 "그간 여성은 남성보다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며 "연쇄살인마와 추적자를 같은 여성으로 배치하면 도덕과 무폭력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여성의 다양함을 부각할 수 있다"고 의미를 뒀다. '구경이'의 스릴러를 이끄는 세 여성은 20대(케이), 30~40대(구경이), 50~60대(용국장)로 세대는 다르지만, 서로 긴밀하게 얽히며 예측불가의 이야기를 직조한다. 액션이 약하다는 여성 스릴러도 편견이다. 전직 경찰 출신인 구경이는 3층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뒤로 젖힌 뒤 그 빌딩에 정차한 쓰레기 수거차로 툭 떨어지며 긴장감을 준다.
'구경이'를 제작한 키이스트의 박성혜 대표는 본보와 전화통화에서 "처음 대본을 보고 그간 보지 못한 여성 캐릭터와 관계성 등이 흥미로웠다"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뒤틀린 극중 여성들로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장르물을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구경이'는 한예종 출신 30대 여성 작가 두 명(필명 성초이)이 썼다. 두 작가는 한국적 요소를 접목해 여성 스릴러에 새 길을 낸다. 구경이와 용국장이 극비리에 만나는 곳은 지하 요새가 아닌 허름한 대중목욕탕이고, 구경이는 키보드를 난타하며 승리를 거둔 '광복절 대전'이란 전투로 '게임 강국'의 이미지를 스릴러에 녹인다.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죽었대. 여자 두 명이 김정남 얼굴에 뭘 발랐어. 맨손으로 그걸 만진 여자 둘은 멀쩡했고." '구경이'는 '김정남 암살' 사건도 극에 활용한다. 'K스릴러'의 탄생이다. 지난달 31일 처음 공개된 '구경이'는 이날 기준 넷플릭스 '오늘 톱10'에서 1위를 차지했다.
묵직한 범죄·액션 스럴러는 남성들 몫이라는 편견을 깨는 작품들이 요새 인기다. '마이 네임'은 한국 여성판 '무간도'로 주목(넷플릭스 세계 톱10서 9위·9일 기준)받고 있다. 극중 아버지를 죽인 이를 찾기 위해 마약 범죄 조직원으로 경찰에 잠입하는 지우(한소희)는 묵직한 액션으로 남성들이 득세하는 조폭과 경찰 세계를 뒤집으며 살인자를 찾는다. '마이 네임'도 여성 작가(김바다)가 대본을 썼다.
여성 창작자가 만든 스릴러 드라마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비밀의 숲' 시리즈로 유명한 이수연 작가는 연쇄살인범의 도주를 돕는 '유령'의 실체를 쫒는 SF 범죄 스릴러 '그리드'를 제작, 내년 상반기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선보인다. 방송관계자들에 따르면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비롯해 '살인자의 쇼핑목록' 등 여성 PD와 감독이 제작한 스릴러 드라마도 줄줄이 대기중이다. 여성 창작자들이 남성 중심 방송가의 유리천장을 뚫고 의미있는 결과물을 낸 결과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낸 '2020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의 여성 종사자 비중은 2019년 27.5%로, 2009년 18.2%보다 약 10%포인트 증가했다.
여성 창작자들의 실험으로 스릴러의 토양도 넓어지도 있다. 김은희 작가는 산악 범죄 스릴러 '지리산'을 처음으로 선보였고, 마진원 작가는 소리로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는 '보이스' 시리즈로 스릴러의 새 장을 열었다. 올 상반기 방송돼 화제를 모았던 '괴물'과 '빈센조'도 모두 여성 PD가 연출한 스릴러로 주목받았다. '빈센조'를 연출한 김희원 PD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상가 입주자들이 철거자에 맞서 벌이는 투쟁을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연출해 강렬한 인상을 줬다.
여성 스릴러는 ①여성을 비극의 수단으로 도구화하지 않고 ②인물의 성장에 주목하는 게 특징이다. 작가 박진규는 "과거 그 인물의 개인적 트라우마가 현재 그 인물을 어떻게 바꿔놨는지,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어떻게 현재의 인물이 극복하는지 등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게 여성 스릴러의 특징"이라며 "그래서 단순 서사 중심 스릴러보다 시청자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