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대신 처벌집행자를 뽑는 대선

입력
2021.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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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혁명의 방법이 아니라 정치의 방법으로 사회를 이끈다. 거리와 공장에서의 반체제 투쟁을 의회와 정당, 선거에서의 정치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을 민주화라고 하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는 대통령이 대통령을 결정하던 시대에서 시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대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이 낳은 선한 효과는 말할 수 없이 컸다. 한밤중에 누군가 군홧발로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가족이나 동료를 잡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시민은 자유로워졌고 사회는 활력을 갖게 되었다. 관료나 기업도 마찬가지다. 군부와 같은 체제 밖의 힘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자립적인 발전의 길을 찾아야 했다.

1997년, 민주화 10년 만에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은 더 중요했다. 민주화를 이룬 나라는 많다. 하지만 야당 집권이 조기에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예는 거의 없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이 바뀌지 않으면 승자 집단은 오만해진다. 야당도 집권하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비로소 정치 밖의 강자집단들이 민주주의에 순응한다. 노사관계의 안정적 제도화는 물론 정당정치의 활성화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가져온 선물이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고, 누구든 민주주의 안에서 경쟁해야 하는 체제가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시민이 통치자를 결정하고 여야가 번갈아 집권하는 '경쟁적 민주주의'에 이어 필요했던 변화는 사회를 더 깊고 넓게 대표하는 '다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야당의 집권으로 여야 간 권력 게임은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열정을 공익으로 전환하는 '정당 다원주의(party pluralism)'의 길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 단계에서 한국 정치는 길을 잃었다. 정치는 '다원화'가 아니라 '양극화'로 퇴행했다. 대통령들이 이를 주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입법 100일 작전'의 예에서 보듯 국회를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좌익 정권 10년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급기야 국회를 압박해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국민서명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과거청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 정치는 문재인 대통령이 더 확대시켰다.

민주주의를 국민 참여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잘못이다. 민주주의는 참여가 아니라 평등한 참여에 기초를 둔 체제다. 평등한 참여는 대표의 포괄성, 즉 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이 더 넓게 대표되는 것의 함수다. 대표의 질이 좋아야 참여의 질도 좋다. 그렇지 않고 좁은 대표의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국민 참여만 강조하면 민주주의는 목소리 큰 소수의 지배로 전락한다. 정치가 권력투쟁에서 승자가 될 상위 두 정당 사이의 극단적 다툼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민주주의는 함부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상대를 동료 시민이나 동료 정치인으로 여기기보다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인다. 그런 것이 관행이 될 때쯤이면 민주주의는 '스트롱맨'들의 게임으로 퇴락한다.

지금 우리 정치가 이런 모습이다. '정치하는 정치인'은 사라졌다. 서로를 감옥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처벌 집행자'들이 권력투쟁의 전면에 섰다. 이들을 지지하는 열성 시민들은 무례하다. 언론은 이를 부추긴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검투장이 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가 어떤 미래를 만나게 될지 걱정이 된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