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전례 없는 의약품 품귀현상과 반도체 수급부족을 경험한 각국이 기술주권(Technology Sovereignty) 확보에 한창이다.
글로벌 분업을 통해 안정적 생산과 조달이 가능하던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국가적 대응을 통해 자국의 경제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기술주권 강화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지난 6월 4대 핵심산업(반도체, 고용량 배터리, 희토류 등 광물, 의약품 및 원료의약품)에 대한 보고서인 ‘100-Day Reviews under Executive Order’를 발표했다. 미국의 경제안보에 핵심적인 4대 산업 공급망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자국 제조기업의 지원과 첨단 제조공장 유치 등 범정부 차원의 기술주권 확보를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도 반도체 등 핵심물자의 확보와 기술유출 방지를 골자로 하는 ‘경제안보추진법’을 제정할 계획이며, 중국도 암호화 및 우주 분야 핵심기술의 수출규제를 골자로 하는 ‘수출통제법’을 이미 작년 말부터 시행 중이다.
우리 정부도 기술주권 강화를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반도체, 배터리, 백신 분야 34개 기술을 조세특례법상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해 R&D와 설비투자 시 세액공제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국회도 지난달 국가적 중요도가 높은 전략 산업 지원을 위해 ‘국가핵심전략산업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기술주권 확보를 위한 범정부적 지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술주권의 밑바탕이 되는 기술경쟁력이다. 수십 년에 걸친 성공과 실패 경험이 ‘R&D 인내자본’으로 축적될 때, 비로소 국가의 경제안보를 보장하는 기술경쟁력이 달성되고, 확고한 기술주권이 마련되는 것이다.
근래 코로나19로 한국을 K-바이오 강국으로 부상하게 한 바이오 R&D가 대표적이다. 올해 상반기 코로나 항원·항체 신속키트를 비롯한 면역진단물품의 수출액은 21억 7,5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58% 상승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단기성과 창출이 어렵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묵묵히 감내하며 30년간 민관이 빚어온 인내자본이 있다. 1983년 ‘유전공학육성법’ 제정 이래 30여 년간 ‘범부처 신약 개발사업’, ‘스마트 헬스케어 산업 활성화 방안’, ‘바이오분야 산업엔진 프로젝트’ 등을 거쳐 온 것이다.
최근 정부가 주력하고 있는 디지털 전환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을 통해 ‘국민 비서, 디지털 집현전’처럼 국민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부터 ‘데이터댐 프로젝트, 자율주행차량, 스마트 공장’ 등 산업생태계에 이르는 31개의 디지털 뉴딜 대표과제를 추진 중이다.
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바로 5G,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XR, 디지털 트윈 등 개별 분야의 기술경쟁력이 누적되고 결집돼야 비로소 디지털 전환을 통한 기술주권 확보가 가능하는 점이다.
11월 1일, 정부는 위드 코로나를 선포하며 새 시대를 예고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도 제자리를 찾게 됐다. 하지만 바이러스와 공존 속 일상복귀는 여전히 디지털 전환을 통해 해결해야 될 숙제다. 새 시대에 걸맞는 기술주권 확보를 위해, 이제는 촌각을 다투는 R&D를 넘어 R&D 인내자본 축적에도 주목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