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이걸 한다고? 진짜 이걸 한다고?"
지난 5일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중 한 편인 '통증의 풍경'에 출연한 배우 백지원은 대본을 받아든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독사로 위장한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통증의 풍경'은 무기력을 이야기한다. "기존 드라마와 달리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나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시해 주는 게 전혀 없는 대본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 이 작품에서 노파 역을 맡은 배우 길해연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영상적으로 다르게 접근하는 작품이라 (KBS가) 이걸 진짜 한다고? 할 수 있다고? 싶었다"며 "이런 도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보탰다.
기존 사회의 가치를 전복하고 의문시하는 소위 '예술'을 해온 게 영화라면 그에 비해 하위 장르로 취급돼온 TV 드라마는 당대의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는 편에 서 있었다. '통증의 풍경'은 이같은 영화와 드라마의 전통적 장르 경계가 더이상은 무의미하다고 못박는다. KBS는 'TV 시네마'를 내세운다. 극장 상영까지 염두에 둔 포맷으로 제작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에서 먼저 공개했다. '통증의 풍경'과 '희수', '사이렌', 'F20' 등 4편이다. 이상 4편의 TV 시네마와 단막극 6편을 지난달 22일부터 매주 방영 중이다. 지상파 중 유일하게 매년 KBS가 단막극을 선보이는 '드라마 스페셜'을 통해서다.
이번에 공개된 '드라마 스페셜' 작품들은 대중성을 전제하되 그 안에서 가장 실험적 지향을 시도해온 단막극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딸을 잃은 부모가 가상현실(VR)로 죽은 딸을 복원시켜 파국으로 치닫는 '희수'는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를 현실감있게 그린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VR을 통상 기술적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고 폐쇄회로(CC)TV와 같은 이미 일반화된 관리 감시 체제와 연결지어 충분히 있음직한 상황을 설득력있게 그려냈다"며 "소재 등 면에서 드라마의 질적 발전을 끌어냈다"고 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이번 작품들은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나 새로운 접근 방식이 TV 시청자 입장에선 조금 어렵지만 새롭다는 느낌은 충분히 줬다"며 "장편이 아닌 단편이 주는 간편한 재미가 있는데 앞으로 선보일 단막극도 궁금해진다"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흐려진 만큼 TV 시네마 등으로 구분짓기보다는 콘텐츠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윤 교수는 "사이즈가 커서 편성이 쉽지 않은 연속극과 달리 단막극은 마음 먹기에 따라 유동적인 편성이 가능하다"며 "KBS 자체가 하나의 OTT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단막극을 하나의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연속극과 달리 삶의 단면을 잘라 비추는 단막극의 특성상 신선한 소재와 이야기 실험 등 새로운 시도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한편 방영이 보류된 'F20'이 남긴 논란은 아쉬움을 남긴다. 조현병의 질병분류 코드인 F20을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은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다. "차별과 편견에 대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던진다"는 게 제작의도였지만 조현병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지난달 29일 방송이 무기한 연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