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커밍아웃’을 받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17일 개봉하는 변규리 감독의 ‘너에게 가는 길’입니다.
이 영화엔 트랜스젠더 아들을 둔 엄마 ‘나비’, 게이 아들을 둔 엄마 ‘비비안’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나비와 비비안은 성소수자부모모임(부모모임)에서 이들이 쓰는 활동명입니다.
두 엄마 중 나비 정은애(57)씨를 만났습니다. 정씨는 자식인 한결(27)씨의 부탁으로 2017년 4월, 처음 부모모임에 참석했다가 자식의 성 정체성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로부터 한결씨의 몸과 법적 성별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꾸는 여정에 함께합니다. 그 길 위에서 엄마 정씨는 자신 역시 돌아보게 됩니다.
“성소수자는 병에 걸린 것이니 치료받으면 된다” “의지로 바꿀 수 있다”며 억압하는 목소리에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겠죠. 그런데 꼭 바꿔야 하나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체화하는 건 자기 자신이죠.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이 바꾸라고 강요하나요. 무례해요”라고 반박하는 ‘투사’ 엄마가 됐죠.
그가 모임에 처음 온 부모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아이가 성소수자여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도 문제가 없다. 내 아이를 혐오하는 세상이 문제인 거다. 물론 그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된다. 그러잖아도 힘든 아이한테 짐을 얹어 주지 말자.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폭탄을 던진 게 아니다. 오랜 시간 고민하다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거다. 그만큼 당신을 믿고 있는 거다.”
자신 역시 ‘세상에 한결이와 나 둘뿐이구나’ 생각했을 때 이 모임의 부모들에게서 큰 위로와 힘을 받았으니까요.
아들 덕분에 ‘성소수자 자식을 둔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더해진 삶을 살고 있는 그를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정씨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재구성해 썼습니다.
나도 몰랐다. 내가 나의 소개를 그렇게 하게 될 줄은.
그간 내가 인지했던 내 정체성은 이런 것. 58년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 정은애.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을 졸업하자마자 일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가장으로 생계를 꾸리는 워킹맘이자 싱글맘, 사람에 관심이 많아 상담심리대학원도 다닌 고뇌하는 인간, 그리고 38년차 소방공무원. 올해 7월부터는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소방공무원노조 위원장까지 맡고 있다.
이런 내 이름 석 자 앞에 또 하나의 의미가 생겼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당한 성차별, 성폭력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그래도 소방공무원으로서는 어디 가서 욕먹지 않았는데. 이 새로운 정체성만으로 무조건 비난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 정체성이란 이런 것이다. 5년 전부터 나는 나를 종종 이렇게 설명한다.
“제 아이는 트랜스젠더 남성이에요. 바이젠더(Bigender), 팬로맨틱(Panromantic), 에이섹슈얼(Asexual)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엔 나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워서 소개를 했다. 그래도 그렇게 소리 내어 내 자식의 정체성을 말하는 건 중요한 의미였다. 한번은 BBC NEWS KOREA와 인터뷰를 하는데 팬로맨틱을 ‘폴로맨틱’이라고 잘못 말하기도 했다. 옆에 있던 아들 한결이가 다행히 고쳐주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결이는 안 되겠다는 듯 나를 붙잡고 ‘과외 수업’을 해줬다. “엄마, 이리 와 봐. 무슨 뜻인지 설명해줄게. 잘 들어.”
그러니까, 이런 거다. 바이젠더는 자신을 두 개 이상의 젠더로 인식하는 것이고, 팬로맨틱은 상대의 성별에 상관없이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것, 에이섹슈얼은 어떤 상대에게도 육체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걸 말한다. 거기에 더해 한결이는 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지향성도 있다. 폴리아모리는 상대방이나 자신이 둘 이외의 사람과도 연애, 섹스, 스킨십을 할 수 있도록 관계를 열어 두는 사랑의 형태다.
다시 말해, 내 아들은 FTM(Female to Male) 성소수자이고, 나는 성소수자 자식을 둔 엄마다. 내 자식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외워서 말할 때는 그저 ‘난 너를 부당하게 괴롭히지는 않는 거야’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온전히 이해하고 소리 내어 말하니 ‘난 너를 마땅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어’라는 의미가 실리는 걸 느낀다. 이해나 존중에도 단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꼭 성소수자 부모로서 사람들 앞에 설 때가 아니더라도, 나는 동료들한테 “제 아이는 트랜스젠더인데요. 알고 보니, 제가 퀴어 인권에 대해 몰랐던 게 정말 많더라고요”라면서 먼저 말을 꺼내곤 한다. 커밍아웃은 성소수자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굳이 그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있다. 가시화하고 싶어서다. 우리 주위에 성소수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어서다. 그래야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남자들끼리는 흔히 음담패설로 요약되는 성희롱 발언을 주고받다가도 그 무리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끼면 조심하게 되듯이. 내 주변, 내가 아는 사람 자식도 게이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면 그렇게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후회가 돼서 그렇다. 나도 만약에 주위에서 트랜스젠더를 봤거나, 누가 트랜스젠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더라면 ‘우리 아이가 혹시?’라는 생각을 한번은 했을 테니까. 20년이 넘도록 내 자식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이가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혐오 발언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한결이의 젠더가 남다르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여자아이인데도 장난감 총이나 칼을 갖고 놀았고 인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건. 아이가 생후 24개월쯤 됐을 때다. 아이 큰엄마가 선물해준 드레스를 입히려고만 하면 “나중에”라면서 밀어내는 거다. 말이 늦어 싫다는 표현을 아이는 그렇게 했다.
그래도 마냥 옷을 묵혔다간 걸쳐보지도 못하고 커 버릴 것 같아서 어느 날 작심하고 아이를 설득했다. “이거, 큰엄마가 사준 옷이잖아. 예쁘지? 큰엄마 곧 만날 거니까 입어보자.” 그랬더니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예쁘면 엄마가 입어!” 두 가지에 놀랐다. 어라, 얘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할 수가 있었나. 그리고, 이 옷이 그렇게 싫은가. 그러기 시작해 한결이는 중ㆍ고교 때도 치마 교복을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해야 하니 치마는 입을 수 없다는 이유 같은 걸 학교에 대면서 혼자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걸 보면서도 난 아이가 그냥 선머슴 같구나 하고 말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알고 보니 자기 벗은 몸을 보는 게 싫어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며칠씩 그대로 자고 먹고 한 건 줄은, 몰랐다.
다만 ‘혹시 얘가 레즈비언인가’ 짐작만 했다. 유치원 때 여자애한테 연애편지 같은 걸 주더니 중ㆍ고교 다닐 때까지도 그랬으니까. 한결이가 초등학교 때, 내가 슬쩍 물어본 적도 있다. “한결아, 너한테 레즈비언 성향이 있는 거 같아.” 그랬더니 아이가 “응, 그런 거 같아” 하는 거다. 속으로 ‘아, 레즈비언이 무슨 말인지 아는구나. 진짜 그럴 수 있겠구나’ 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레즈비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두고 수군거리는 애들에게 오히려 화가 났다. ‘그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내 아이의 다소 특별한 성향이나 행동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게 레즈비언이었던 거다.
그런데, 오판이었다. 나는 내 아이를 모르고 있었다.
성소수자 부모들이 쓰는 표현이 있다. ‘커밍아웃을 받다.’ 자식이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걸 그렇게 말한다. 성소수자 중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비율은 불과 20~30%라고 한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한테조차 말하기 그토록 어렵고 두려운 일이 커밍아웃이다. 그러니 자식에게 부모란 얼마나 가깝고도 먼 존재인가. 달리 말하면, 자식이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부모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한결이의 커밍아웃을 2017년 4월 부모모임에 갔을 때 받았다. 그전부터 한결이는 심심찮게 말하곤 했다. “엄마, 성소수자부모모임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엄마가 소방관 인권운동을 하는 것처럼, 그 단체 활동도 하면 좋을 텐데.”
그때마다 “아이쿠, 그거 하려고 (전북에서) 서울까지 가? 좀 한가해지면 가볼게. 지금은 바빠서 못 가”라고 했다. 그래도 한결이는 틈만 나면 그 모임 얘기를 꺼냈다. “엄마가 가봤으면 좋겠는데.” 얘가 내게 뭘 그렇게 부탁해본 적이 있었나.
그러던 중 이번엔 대전에서 모임을 한다며 한결이가 함께 가보자고 또 청했다. 마침 시간이 좀 났을 때라 가보기로 했다.
부모모임에 갔더니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자기 소개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런 말로 내 소개를 시작했다. “제 아이는 레즈비언이에요.”
그리고 한결이 차례. 그런데 아이의 입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저희 엄마는 저를 레즈비언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뭐라고? 트랜스젠더? 모임이 끝나고 한결이에게 물었다. “왜 트랜스젠더야? 너는 성전환 수술(트랜지션)도 안 했잖아.” “수술 안 한 트랜스젠더도 있어.” “그래?”
여느 부모들이 보면 나더러 무심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다니까 별로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수술 안 한 트랜스젠더도 있다니까 막연히 ‘뭐, 특별히 어려울 건 없겠구나’ 하고 말았지. 아무리 자식이지만, ‘인생은 너는 너, 나는 나’ 아닌가. 게다가 인생이란 게 미리 고민하거나 복잡하게 생각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는 게 세월이 준 교훈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역시 부모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 안이었다. 갑자기 한결이가 말했다. “엄마, 나 (성전환) 수술하고 싶어.” 놀라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그때도 난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해야지. 그럼 수술은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거야? 비용은 얼마나 들겠어?” 그 말을 듣던 한결이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FTM은 성기 재건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며, 비용은 1,000 만 원 정도라면서. 아이한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얘기였니.”
하기는, 한결이의 정체성을 몰랐을 때 내가 어땠던가. 사춘기 때 “엄마, 나는 가슴이 없었으면 좋겠어”라는 아이에게 “아마조네스(신화 속 여전사 부족)들도 활을 잘 쏘려고 가슴을 절제했다고는 하던데, 아무리 힘든 세상이지만 가슴을 없애고 싶다고 하는 건 비겁한 일이야. 아무리 성차별이 심한 사회라고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문제를 회피하는 거야” 같은 훈계나 했다. 그게 혐오고,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 그간 스스로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었을까. 나이 스물세 살에야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수술 얘기를 꺼냈으니.
수술을 결정한 그때부터,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법적 성별을 바꾸는 일까지를 포함했다. 그러니 한결이의 외가와 친가 가족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가족의 인정은 성소수자 본인에게 중요한 의미다. 물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 한결이는 불안해 했다.
“걱정하지 마. 외가 식구든, 친가 식구든 누구라도 너한테 혐오 발언을 하면 엄마가 상을 확 뒤집어엎고 나올 테니까.”
가족들을 만나 나는 말했다. “얘가 트랜스젠더야. 원래 성정체성이 남자인데 몸이 여자라 그동안 많이 힘들어했어. 그래서 (몸도, 법적 성별도) 바꾸고 싶어 해.”
예상 외로, 양쪽 가족은 한결이의 뜻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가장 걱정한 사람이 개신교 신자인 언니였다. 그런데 언니도 처음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이내 “그래. 한결아, 어릴 때부터 넌 남자애 같았어”라고 말했다. 우는 엄마, 그러니까 한결이 외할머니를 언니가 “괜찮다”며 옆에서 다독이기까지 했다.
전남편과 오래전 이혼했지만, 한결이의 친가에도 말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한결이 고모와 큰아버지도 “먼저 말하기 전에 아는 척할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고 말해줬다. 커밍아웃을 대하는 훌륭한 자세를 목도했다. 나를 예뻐하셨고, 나 또한 잘 따랐던 시아버지도 처음엔 아무 말씀 안 하시더니, 우리가 돌아갈 때쯤 “한결이라는 이름은 바꾸지 않아도 되느냐”라고 물으셨다. 아흔 살을 바라보시는 시아버지도 이해하신 거다. 그 자리에 있던 한결이 아빠 그러니까 전남편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양쪽 집에 커밍아웃을 하고 한 달 뒤인 10월 가슴 절제 수술을, 그 이듬해인 2018년 자궁 절제 수술까지 마쳤다. “엄마, 고마워.” 수술을 마치고 누워 있는 한결이에게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진짜 원했구나. 좋아하니 다행이야.’
이제는 법원이다. 법적 성별도 남성으로 바꿔야 했다. 성별 정정 신청 결과는 판사마다 판단이 다르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 그래도 수술을 했으니 법적 성별도 당연히 고쳐야 한다. 한결이는 걱정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결국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단번에 되느냐 여러 번 시도를 해야 하느냐의 문제일 뿐. 이미 성별 정정을 허가한 사례가 있지 않나. 그게 자식보다 더 오래 산 세월에서 나오는 지혜일까.
첫 신청 때 기각 결정이 나오고 나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구나. 다른 지역 법원에 다시 신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에겐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서울가정법원에서 기각된 지 6개월 만에 내 연고지인 전북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 다시 성별 정정 신청을 했다. 그 결과, 허가 결정. 심문 때 판사는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관대하지 못하지만, 그에 너무 상처받지 말고 당당하게 사시라”고 했다.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런 판사들 덕분에 많은 성소수자가 위로받고 힘을 내고 사는 거다. 성소수자들에게 그런 한 줄기 희망조차 없을 때,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만 해도 한결이가 “엄마, 나는 길 가다가 돌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어”라며 울부짖을 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식이 그렇게 말해도, 내가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폭력을 퀴어문화축제에 가서야 처음 당했다. 반대자들은 “동성애는 죄악” “동성애 유전자는 없다”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같은 폭력적인 문구를 들고 시위를 하고 축제를 방해했다. 성소수자 부모들은 대명천지에 그들에게 옷이 뜯기고, 안경은 밟혔으며, 맞아서 온몸에 멍이 들었다. 그때 처음 공포감이 들었다. 우리 애들이 사는 세상이 이렇구나. 이게 우리 자식들에게는 실제의 삶이구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구나. 한번은 그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두고 시위를 하던데, 차이코프스키도 동성애자였다는 걸 알기는 아나.
그러니까, 퀴어문화축제에 한번 가본 부모들은 투사가 된다. 그다음 퀴어축제에도 대부분 다 참가하는 이유다.
그런 현장에서 부모들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성소수자들은 큰 위로를 느낀다. 그 강력한 상징 같은 행사가 부모모임이 하는 ‘프리 허그’다. 해보기 전엔 막연히 ‘자기 부모한테 지지받지 못하는 성소수자에게는 위로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안아 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런데 실제 해보니, 이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프리 허그를 해주는 부모들 앞에 선 그들의 눈빛은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다. 마치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받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아.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해도 있는 그대로 당신을 이해해. 이 공간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존중해’라는 마음으로 안아 준다. 그건, 한 세상과 다른 한 세상이 만나는 의미다. 그저 그들의 부모 대신 안아 주는 게 아닌 거다. 그러니 퀴어축제 때 성소수자들이 프리 허그 부스 앞에서 그토록 설레며 기다리는 거였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다. 밥보다 중요한 게 응원과 지지, 사랑 아닌가.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들은 그걸 흠뻑 느끼는 거다. 퀴어퍼레이드 때 느끼는 해방감, 그 시간만큼은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기분이 든다. 왜 이 사회에서 내 자식이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지 억울함도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부모들도 그런데 본인들은 오죽할까.
‘위태롭다.’ 한결이를 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일 뿐. 지난해 그게 최고조에 달했다. 고 변희수 하사 강제 전역, 트랜스젠더 합격생을 둘러싼 숙명여대 재학생들의 반발 같은 사건을 잇따라 겪으며 아들은 마치 제 일인 듯 힘겨워했다. 우울감이 심해져 정신과 약으로 버티다시피 했다. 그러잖아도 중ㆍ고교 때 수없이 자해를 했던 아들이다.
부모모임에도 멀쩡히 엄마 손잡고 왔다가도 다음 달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아이들을 봤다. 내게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항상 내 자식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너무나 불안하다.
그렇다고 마냥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라고 강요하는 건 내 욕심. 이렇게 성소수자에게 혐오가 강한 사회, 14년째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 못 해 정의가 지연되는 사회에서 버티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나라도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은데. 그럴 때 떠올려 주겠니. 그 어떤 순간에도 네가 외롭지 않게 엄마가 옆에 있을 거라고. 이렇게 전적으로, 무조건 너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걸 기억해 달라고.
그래서 어미의 이기심으로 또 한번 바라보는 거다. 상처받기 쉬운 세상에서 조금만 더 버티고 살아 달라고. 너와 내가 이렇게 손 붙들고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오지 않겠느냐고. 당장 바뀌지 않는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거나 슬퍼하지는 말자고. 천천히, 끈질기게, 차근차근, 올곧게 가다 보면 우리가 움직인 만큼 세상은 바뀌어 있을 거라고. 태몽에서 반짝이는 물속을 헤엄치는 비단잉어로 내 곁에 왔듯, 빛이 들고 자유로이 숨쉴 수 있는 때가 오지 않겠느냐고.
무엇보다 네가 내 자식이라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걸 알아달라고. 너의 커밍아웃이 ‘엄마, 도와줘’라는 외침이라는 걸 깨닫고 나이 쉰이 넘어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시 배울 수 있게 됐다고. 트랜스젠더가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사회라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스트레스 받는 거 알지만, 오늘도 ‘엄카(엄마카드)’를 써서 울리는 ‘띵동’ 문자메시지 소리가, 이 엄마에게는 네가 살아 있다는 신호 같다고. 너의 커밍아웃을 받은 뒤 내가 몰랐던 너에게, 그리고 너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나에게 가는 이 여정이 내게는 무척 소중하다고. 이것이 너와 함께 출연한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 담은 엄마의 마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