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제 투표는 대체로 한쪽에 쏠려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을 다닌 선후배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을 봅니다. 그 연유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80년 5월이 우리 세대에게 남긴 거대한 부채의식과 죄의식, 그리고 대학시절 겪었던 군사정권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흔히 “원흉”이라고 부르며 미워했던 이들 가운데 한 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긴 시간이 겨우 만들어 준 평정심을 가지고 그 분의 삶을 되새겨보면서 마음이 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가 세상에 남긴 일들 가운데에는 지금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외교적 경계가 크게 늘어나고,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 시기가 그 분의 재임기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말년 자신의 과오에 대해 신실한 반성을 했던 흔적도 보입니다. 스무 살에 그에 대해 품었던 순수한 분노와 미움과는 좀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누군가의 삶을 간단히 평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지금 우리는 선거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줄이려 애쓰며 살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그 이후 5년, 때로는 더 긴 시간 나라의 방향과 운명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저처럼 스타트업 혹은 혁신적인 기업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 선출될 대통령이 겪어낼 다섯 해는 정말 역동적이고 복잡한 시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거대한 기술적 혁신이 더 가속화할 것이고, 산업과 지역의 패권은 크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섯 해에 우리가 결정해야만 할 일들은 과거 수십여 년 동안 우리가 의사결정한 것들과 맞먹는 파급효과를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후변화, 노령화, 가상자산, 노동규제, 연금개혁, 교육제도와 같은 영역에서 우리는 아마 더 미룰 수 없는 의사결정 앞에 내몰릴 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달콤하기만 한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마 꽤 쓴 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상당한 갈등을 겪으면서 변화의 파도를 겪어내야 하겠지요. 그 파도를 맨 앞에서 맞아야 할 대통령 후보가 대략 정해졌습니다. 특히 유력한 정당의 후보들은 역대 어느 후보들보다 더 강한 사랑과 미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최근 각 진영이 상대 후보를 향해 던지는 언어에는 아주 극단적인 혐오와 미움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그들의 삶에 묻어 있는 과오가 자꾸 부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후보도 성인 군자이거나 악의 화신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과오나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 앞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분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명하고 멋진 구호로는 문제를 풀 수 없고, 아주 재미없고 힘들고 지루한 과정을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분. 뜨거운 지지가 아니라 미움을 견디는 법을 아는 분. 세상은 흑과 백 사이 그 어디에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아는 그런 분을 말입니다.
세상의 때가 묻어 회색이 되어버린, 그래서 확신을 잃어버린 자의 넋두리처럼 들리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