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총회 첫 주말, 英글래스고 10만 대행진… “지금 당장, 기후 정의!”

입력
2021.11.07 20:00
17면
영국 100개 도시·지구촌 100개 나라 연대 집회
BBC "2003년 이라크전쟁 반대 집회 이후 최대"
시민들 "COP26 성과 미흡, 기후정의 행동" 촉구
도심 다리 점거한 과학자들 경찰에 체포되기도


“우리가 원하는 건?” “기후 정의!”
“우리는 그것을 언제 원하지?” “지금 당장!”

6일(현지시간) 영국 글래스고 거리를 뒤덮으며 울려 퍼진 힘찬 구호들이다. “화석 연료는 사라져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하던 10대들의 외침이었다.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격려했다. 청소년들은 전날 청소년 환경단체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주최한 집회에 이어 이날도 당당한 주역으로 나섰다. 지난달 31일 개막해 첫 주말을 맞은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들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 달라’고 압박한 것이다.

이날 시위대 속에는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온 여덟 살 소년 이웬도 있었다.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는 이랬다. “침실을 정리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지구를 구하느라 너무 바빠요.” 유모차를 탄 아기와 아빠 어깨에 올라탄 꼬마들도 고사리손에 작은 팻말을 들었다. “나는 작지만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어요.”

‘기후 정의를 위한 세계 행동의 날’로 선포된 이날, COP26 회담장 인근에선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환경단체, 청년단체, 난민옹호단체, 과학자그룹, 노동조합, 아마존 원주민 공동체 등 여러 단체와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서쪽 켈빈그로브 공원과 남쪽 퀸스 공원에서 각각 출발한 이들의 행진은 도심 통과 후 동쪽 글래스고그린 공원에서 마무리됐다. 행사 개최지인 글래스고 외에도 영국 100여 개 도시는 물론, 한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케냐 터키 브라질 등 100개 나라에서도 연대 집회가 동시에 진행됐다.

시위를 주최한 환경단체 연대그룹 ‘COP26 연합’은 글래스고에 10만 명이 모였을 것으로 추산했다. 거센 소나기와 돌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영국 BBC방송은 “2003년 이라크전쟁 반대 집회 이후 최대 규모”라며 “도심을 행진하는 시위대 길이만 3.2㎞에 달했다”고 전했다.

시위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절박했어도, 분위기는 더없이 즐거웠다.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을 입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시민, 드럼을 치는 청년, 영화 ‘스타워즈’ 캐릭터인 다스 베이더로 분장한 사람 등이 흥을 돋웠다. ‘오폐수에 반대하는 서퍼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영국 콘월 출신 시민들은 널따란 서핑 보드에 ‘우리 바다를 다시 야생으로’라는 구호를 적어 왔다. ‘COP26으로 향하는 페달’이라는 기후 퍼포먼스 일환으로 스코틀랜드 20개 지역에서 출발해 오롯이 두 발의 힘으로 글래스고에 도착한 ‘자전거 부대’도 있었다.

이번 COP26은 일주일간 ‘2030년까지 삼림 벌채 중단’ ‘메탄 배출량 30% 감축’ 등 유의미한 성과도 거뒀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석탄화력발전 중단’ 합의에 미국과 중국이 빠진 데다, 시점도 2040년으로 늦춰진 게 대표적이다. 우간다 환경운동가인 바네사 나카테는 “세계 지도자들은 용기가 없다. 시민들이 나서서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움직일 것”이라고 호소했다. 스웨덴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연설에 나서진 않았지만, 전날 시위에서 “COP26은 ‘세계적인 그린워싱(겉으로만 친환경을 내세우는 행위) 축제’로 변했다. COP26은 실패했다”고 일갈했다.

필리핀에서 비행기로 16시간 날아왔다는 베버리 롱기드는 “비가 오든 날씨가 좋든, 춥든 덥든, 우리는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필리핀 이고로트 원주민 공동체의 대표인 그는 “기후변화로 농업 주기가 바뀌고 마을 지하수가 고갈됐다. 최대 피해자인 원주민 사회에 관심이 없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실망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시위는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으나, 불시에 도로를 점거한 과학자들이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기후과학자 행동 단체인 ‘과학자 반란’ 그룹 회원 21명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킹조지 5세 다리 위에서 쇠사슬과 자물쇠로 서로를 결박하고 다리를 막아섰다. 찰리 가드너 영국 켄트대 듀럴생태연구소 부교수는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지도자들한테 의존하고 있을 순 없다. 과학자들에겐 행동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