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은 한달여 전국을 순회하는 최초의 국민참여경선으로 눈길을 끌었다. 경선 시작 때 가장 유력한 후보는 동교동계의 지지를 받던 이인제였다. 하지만 제주로 시작한 경선의 뚜껑을 열자 비주류 군소 후보이면서도 여론의 지지가 남달랐던 노무현이 한화갑과 함께 바로 3강을 만들어 두각을 나타냈다. 최대 분기점은 광주 투표를 앞두고 나온 여론조사 결과였다.
□ 대선 승리가 점쳐지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노무현 41.7%, 이회창 40.6%로 노무현이 근소한 차이로 이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가 이회창을 이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나 다름없던 광주 경선에서 1위를 해 승리의 토대를 만들었다. 대세에 밀린 이인제는 부산과 수도권 경선을 앞두고 사퇴에 탈당까지 한 뒤 이회창 지지로 돌아섰다. 여론조사가 50% 반영된 경선에서 민심이 당심을 견인한 결과다.
□ 비슷한 사례는 5년 뒤 대선에서 반복된다. 일찌감치 한나라당 우세가 예상됐던 선거이긴 했지만 야당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후보의 대결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경선룰은 대의원, 당원, 국민선거인단을 포함한 당심이 80%, 여론조사가 20%였다. 최종 집계 결과는 여론조사 반영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지고도 여론조사에서 8.8%포인트 앞선 이명박의 승리였다.
□ 민심을 거머쥔 후보가 결국 대선 본선에서 유리하다는 것은 이 두 선거 결과가 보여줄 뿐 아니라 상식에도 부합한다. 이번 국민의힘 경선에서 여론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홍준표 후보가 생뚱맞게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후보처럼 되겠다며 자신감을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선 결과는 이와 반대로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이상 뒤지고도 당원 투표에서 20%포인트 넘게 앞선 윤석열 후보의 승리였다. 4개월 동안 또 어떤 바람이 불지 알 수 없지만 이 결과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살갑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