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어때서요?

입력
2021.11.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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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국화가 흐드러지게 폈다. 먼 산꼭대기에서 기슭으로 내려오는 단풍과 많이 닮았다. 다닥다닥 붙어 선 가로수도 그간 받은 빛의 양을 뿜어내고 있다. 꽃과 나무의 자태를 보니 한 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것 같다. 알록달록 꽃과 다소곳한 풀, 든든한 나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림의 좋은 소재이자 시인의 글감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다양한 소통망에서 누군가를 대신하는 얼굴이 되었다. 연인에게는 마음의 정표로, 축하할 자리에서는 선물과 배경으로 꽃은 수천 년간 사람들 곁에 있었다.

한 발 더 내디뎌 숲으로 가 보자. 숲은 생명이 시작되고 서로 다른 식물이 공생하는 공간이다. ‘숲이 우거져야 새도 모인다, 숲이 짙어야 범이 든다’는 옛말처럼, 살아 있는 숲은 식물뿐만이 아니라 무수한 동물을 먹여 살리는 큰 집이다. 숲길, 숲속, 숲 내음 등 각종 광고와 상호에서 숲은 늘 푸르고, 생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묘사된다. 철 따라 되살아나는 식물은 사람에게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주면서 사람을 위로한다.

이상한 것은 꽃과 풀, 나무 하나하나가 좋은 의미로 쓰이는 반면에 이들의 총합인 ‘식물’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식물인간’, ‘식물국회’에서 보듯, 식물은 흔히 기능이 멈추어 있는 대상을 묘사하는 대명사다. 의학용어인 ‘식물인간’은 대부분의 외국어에서 ‘식물’을 어원으로 둔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공통어는 전 세계에서 우연히 똑같이 생성되었다기보다는 전문 영역에서 확산된 특별한 말로 보인다. 설령 그렇더라도 ‘기능이 멈춘 모든 것’을 식물로 대체하여 말할 일은 아니다. 식물은 살아있을뿐더러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생산적이고 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식물경제’란 신조어도 생겼다. 한 나라의 경제가 변화 없이 침체되어 있는 상태를 식물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매일 먹는 밥도 과일도 식물에서 얻으니, 오히려 경제가 식물만 같아도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요즘 반려식물도 많이 키운다. 식물은 자기 얼굴을 대신할 인상을 넘어, 사람이 가까이 두고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다. 또한 한식의 자부심을 담는 주요 소재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식물을 얕잡아 본 적은 없었다. 오늘 파란 하늘 아래서 손짓하는 나뭇잎을 눈에 담았는가? 혹은 탐스러운 꽃잎에 잊었던 감탄사를 터트렸는가? 그렇다면 ‘식물’ 파생어를 마구 만들기 전에, ‘아낌없이 주는 식물의 가치’를 누군가와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