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도현이 국내 무대에 올랐다. 2019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해 국내에 이름을 알렸고, 지난달 부소니 콩쿠르에서는 준우승을 했다.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군포필하모닉오케스트라(지휘 여자경)과의 협연 무대는 준우승 이후 첫 국내 무대다. 연주할 작품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중 연주하기 가장 까다롭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작곡 방식도 난해하지만, 이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은 더욱 깊고 복잡하다. 이 작품은 김도현이 부소니 콩쿠르 결선에서 선보였던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중계로만 지켜본 한국의 관객들에겐 그의 연주를 라이브로 들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피아노가 첫 발을 내딛는 분산화음부터 김도현은 콩쿠르보다 훨씬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내 1악장 카덴차에 이르렀다. 언뜻 야성적이고 야만적으로 보였지만 철저히 계산된 클라이막스였다. '지킬과 하이드' 사이에서 탁월한 균형을 갖췄다. 정신 없이 기교적인 패시지에서도 부각해야 할 장치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결코 온전한 광기의 하이드가 등장하지 않았다.
연주 내내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아무리 음표들의 배열이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작곡가가 계산적으로 이 작품을 그렸기 때문에 연주자 역시 작품에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김도현은 섬세한 다이나믹 설계 등 잘 통제된 음악으로 의도된 무질서를 그려냈다. 이로 인한 짜릿한 서스펜스는 덤이었다. 폭발하는 듯한 극도의 흥분상태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철저한 빌드업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충격에 비틀거리는 사나이,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깊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갑작스러운 충격 등 작품의 심상이 모두 선명하게 무대 위에 탄생했다. 또 가진 테크닉도 뛰어나, 이 작품의 모던하고 세련되면서 입체적인 특징을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
군포프라임필 역시 김도현의 음악을 받아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었다. 협연자와 개성을 경쟁하기보다는 '훌륭한 서포터'가 되는 쪽을 택했다. 부소니 콩쿠르 결선 당시, 김도현은 하이든 오케스트라와 이 작품을 연주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연주자의 호흡을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해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이 날 군포프라임필과 여자경 지휘자는 그 아쉬움을 해소해 주었다.
마침내 작품이 끝나고 한참의 커튼콜 끝에 김도현 피아니스트는 다시 무대에 앉았다. 앙코르로 고른 작품은 쇼팽 에튀드(Op. 25-1)이었다. 역시 지난 부소니 콩쿠르에서 연주한 작품이다. 황폐하고 공포스러운 본프로그램 뒤 더없이 적절한 달콤한 앙코르였다. 앞선 프로코피예프가 음산한 분산화음으로 시작했다면, 쇼팽의 분산화음은 평화롭고 부드러웠다. 악몽 속에서 이제 그만 깨어나게 해줄 선곡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도 높았다. 내성(Inner voice)을 훌륭하게 컨트롤해 작품이 가진 긴 메인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들렸다. 각 성부가 작품에서 해야 할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악보에 놓인 많은 음들이 유기적으로 모여 하나의 노래로 들렸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더 듣고 싶은 연주와 이제 그만 들어도 될 것 같은 연주가 있다고들 한다. 김도현 피아니스트는 전자였다. 더 많은 작품들을 청해 듣고 싶은 피아니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