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끼치지 않는 사회

입력
2021.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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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김홍중에 의하면 우리는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무해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무해의 시대의 사회적 삶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윤리보다는 '이웃에게 무해하라'는 도덕적 원칙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무해의 윤리'는 혈연, 학연, 지연으로 엉겨 붙는 끈끈한 정의 문화, 사회의 약자에게 무심하고 그들을 무시하는 위계적 문화, '무례를 친절로 착각하며' 무심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해 상처를 안기는 오지랖의 문화에 지친 사람들이 모색하는 새로운 도덕적 원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기후변화로 우리 생활양식 자체가 환경에 되돌릴 수 없는 가해를 해온 것이 명확한 지금, 생태친화적 삶을 구성하는 도덕적 원칙을 이 무해의 윤리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파워스의 소설 '오버스토리'의 예언자 같은 식물 생태학자 웨스터포드가 사람이 파괴된 숲을 복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무위의 전략은 무해의 윤리와 통한다.

하지만 사회 연대의 원리를 고민하는 사회학자에게 무해의 윤리는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사회적 연대감이 크고, 작은 부탁을 서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쌓이는 긍정적 감정과 신뢰에 기반한다는 것이 사회학의 오랜 명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대부'의 첫 장면에서 비토 콜레오네는 남자친구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한 딸의 복수를 부탁하러 찾아온 장의사 보나세라에게 말한다. "어느 날, 그리고 그 어느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당신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정의를 내 딸아이의 결혼식 날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로 받아 두시오."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사회 자본이라는 것도 결국 이렇게 서로 부탁을 교환하면서 누적되는 '사회적 전표'에 다름 아니다.

서로 부탁하기를 꺼려하고 신세지는 게 부담스러워 회피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무해의 시대에 사회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무해의 윤리에 기반한 사회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스마트폰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24시간 배달시킬 수 있고, 집에서 에스프레소 메이커로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으며, 넷플릭스로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해도, 섬이 아닌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타인에 대한 가해가 두려워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없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국가나 시장, 아니면 가족일 것이다. 최근 동료들과 실시한 사회조사에서, 신세 지기 싫어하고 남에게 부탁하기 꺼려하며 사생활의 보호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가족에 대한 신뢰는 높고 타인에 대한 신뢰는 낮으며, 곤경에 처한 가족을 도울 의사는 강하지만 이웃이나 남을 도울 의사는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에서 무해한 사람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족만 남는 것일까? 하지만 한국의 가족은 이미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 하고 있다. 또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가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해의 시대, 무해한 사람들의 공동체와 사회적 연대의 원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