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이나타운의 구원을 믿고, 아직까지 그 믿음은 단 한 번도 배신당한 적이 없다. 2019년 초겨울에 나와 아내는 이탈리아 로마의 한 허름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크게 싸웠다. 로마의 유적들은 숨이 멎을 듯 감탄스러웠으나 식사가 문제였다. 관광객을 노린 비슷한 식당들의 뻔한 메뉴에 곧 질려버렸다. 숙소도 문제였다. 사진에선 아름다운 고택으로 보였던 숙소가 사실은 고물로 가득 찬 하숙집이라는 걸 깨달은 부부는 평정을 잃고 에어비앤비를 저주했다. 부부싸움이 항상 그렇듯 티핑포인트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리커숍에서 사온 와인이 너무 맛이 없는데 그게 내 탓이냐 네 탓이냐 포도 탓이냐 정도의 하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구원의 손길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우연히 들른 로마의 중앙역인 테르미니 인근에서 한자 간판을 발견했고,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한자인 ‘관(馆)’자로 중식당임을 확신했다. 서로 말이 없던 우리는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그곳으로 달려갔다. 요리의 이름을 몰라도, 점원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우린 그날 우육면 국물과 군만두 육즙이 때론 스러져가는 한 부부의 사랑을 재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식사를 마치고 찾아보니 테르미니 역 앞에 있는 에스퀼리노 언덕 인근은 차이나타운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밤늦게까지 하잖아.” 국외 여행에서 느낀 차이나타운의 소중함이 마치 나만의 경험인 양 늘어놓는 내게 한 친구가 말했다. 레스토랑이 영업을 멈추는 크리스마스 시즌은 이민자들에겐 불친절한 시간이라, 뉴욕에 사는 친구네 부부는 연말이 되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하필 그해에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생각해보면 좀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보스턴이라고 크리스마스를 쇠지 않는 건 아니니까. 늦은 저녁에나 도착한 친구 부부는 문을 연 식당을 찾아 헤매다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불야성이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중국인 거리의 패루였다. “뉴욕도 마찬가지야. 새벽 4시에도 차이나타운에선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니까. 출장에서 지친 몸으로 밤늦게 돌아온 날, 따듯한 국물요리를 시켜 먹으면 누군가 나를 반겨주는 느낌이 들지.” 뉴욕의 유명 음식점 셰프들이 밤늦게 차이나타운에서 목격되는 이유기도 하다.
“게다가 싸잖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미국에선 둘이서 밥 먹고 맥주 한두 잔 마시고 팁까지 치르면 100달러가 훌쩍 넘거든. 거기에 비하면 차이나타운은 배부르고 싸지.” 친구 부부는 몇 년 전까지 뉴욕에 살았는데, 백인인 친구의 남편은 퀸스 플러싱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는 걸 여행처럼 즐거워했다고 한다. “플러싱에 갈 때면 정말 전철에서부터 백인을 찾기가 힘들어. 같은 뉴욕인데 국외로 여행 온 것처럼 신기해하더라고.” 우리도 그 기분을 안다. 인천의 개항동에서 또 부산의 초량동으로. 빨갛고 노랗고 거대한 패루를 지나 거리를 가로지르며 흩날리는 홍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온 몸의 피부가 두근두근거린다.
이런 흥분을 최고조로 느꼈던 곳은 역시나 요코하마가 아닐까? 간나이 역에서 내려 몇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국경절 축제의 요란한 쇳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거대한 붉은 도시를 누비는 사자춤 행진에 신나하는 중년의 아저씨(나)를 보고 아내는 “아들 키우는 것 같네”라며 혀를 찼다. 또 어디가 있더라? 그렇다. 방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저녁의 야왈랏로드는 문화 대격돌의 현장이다. 빨간 조명과 노란색 네온 간판들이 4차선 왕복 도로를 대낮처럼 밝혀주고, 그 조명 아래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인종이 모여 맥주를 마시며 난장을 벌인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일순간 흥분이 임계치를 넘어 몸이 잠시 얼어붙었더랬다.
모두에겐 각자의 차이나타운이 있다. 롤링스톤 매거진이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밴드 중 가장 위대한 밴드’라고 표현한 미국의 인디팝 밴드 루나의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하나만 꼽자면 ‘펜트하우스’ 앨범의 1번 트랙, ‘차이나타운’이다. 나른하면서도 섬세한 멜로디의 기타 리프 사이사이 밴드의 송라이터인 딘 위어햄의 낭창한 목소리가 멋진 술을 마시고 행운의 건배(“Fancy drinks and lucky toasts”)를 나누는 차이나타운의 밤을 그린다.
누군가는 이 곡의 가사를 해석하며 이런 글을 올렸다. “’차이나타운’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걱정 없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이십대 초반을 그린 노래야.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그런 기분을 느껴야 마땅하고, 나도 그랬지.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면 인생은 미친 듯이 복잡해진단 말이지.” 그 찬란한, 그러나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리는 무상한 젊음의 배경이 차이나타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인생은 복잡해지고, 얕은 감상에는 생각이 뒤따른다. “플러싱에서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거나 돈을 떼여가며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덕에 누군가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셈이지. 꼭 중국인이나 아시아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히스페닉들도 많아.” 포틀랜드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올해 5월에 난 한 기사가 떠올랐다.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중국인 거리 중 하나인 런던 차이나타운에 아시아인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는 기사였다. 한 단체가 지자체와 손을 잡고 신원 확인 없이 백신을 접종해주겠다고 나서자 코로나 백신의 사각지대에 있던 체류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문득 대학 신입생 때 만난 친구가 떠올랐다.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진했던 그는 어느 날 중앙도서관 옆 코트에서 농구를 하다가 내게 “나는 화교라 너처럼 취업을 할 수는 없어”라는 말을 던졌다.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그때는 자세히 묻지 못했고, 그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본 첫 중국인이었을 것이다.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의 이정희 교수는 1999년 대구 영남일보 기자였던 시절 인천 차이나타운을 취재하러 찾았다가 느낀 황량함을 잊지 못한다. 1930년대까지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권을 압박할 정도로 거대했던 한국 화교 세력의 상징인 인천차이나타운에는 당시 영업 중인 중식당이 2~3개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한반도의 화교사를 연구했다. 나는 친구에게 하지 못한 질문을 이 교수에게 던졌다. 그는 “아마도 그 친구 역시 대만 국적인 노화교 출신이었을 확률이 높아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못했고, 화교들은 자동적으로 중화민국(대만) 국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 본토가 고향인 사람도 대만 국적으로 한국에서 살게 되었지요. 외국인이라 공무원은 될 수 없었고, 일반 기업은 화교 취업을 공개적으로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중국어가 필요한 무역 분야가 아니고는 화교를 받아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한 차별이 있었던 거지요.”
이 교수는 한참 동안 노화교가 중심인 인천과 신화교가 중심인 대림의 차이나타운의 차이에 대해, 또 한국의 노화교들이 겪은 역사적 부침에 대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다 보니, 한국 땅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함께 농구를 하던 친구에게 뜬금없이 ‘난 취업을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만들 만큼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중국행 슬로보트’에도 당황하는 사람이 등장하다. 프랭크 로서의 노래 'On A Slow Boat to China’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화자인 ‘나’가 자신이 만난 중국인들을 기억해내는 내용이다. 한국만큼 외국인을 보기 힘든 국가 일본에서 ‘나’가 만난 첫 중국인은 중국인 초등학교의 교사다. 자신의 학교에서 유일하게 중국인 초등학교를 모의고사장으로 배정받은 ‘나’는 집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학교에 시험을 치르러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그 시험장에 모의고사 감독으로 들어온 교사가 바로 ‘나’의 첫 중국인이다. 그는 시험을 보러 온 일본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렇지요? 우리 두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노력만 한다면 틀림없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작가인 무라카미씨의 고향은 교토지만, 그가 실제로 자란 곳은 효고현의 아시야 시로, 거대한 차이나타운 난킨마치가 있는 고베에서 전철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당연히 ‘중국행 슬로보트’의 이야기 전체가 작가의 경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겪은 어떤 경험의 실체가 이 이야기 속에 다른 몸통을 쓰고 고스란히 누워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집에서 30분 동안 전철을 타고 ‘세상의 끝에 있는 중국인 초등학교’에 가서 처음 만난 중국인으로부터 극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한 연설을 들은 일본인 아이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농구장에서 느닷없는 친구의 고백을 들었던 내 느낌과 조금은 비슷했을까?